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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황정욱의 묘에서 안산을 보다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6-27 조회수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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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황희정승은 매우 유명한 정승이라 많은 사람이 그의 묘를 찾고 있다. 그런데 황희정승의 묘역 부근에 황정욱의 묘가 있고 그의 묘와 신도비가 파주시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황정욱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7번지에 있는데 황희정승의 묘역이 금승리 산 1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먼 곳이 아니다. 부근에는 황희정승의 묘역을 알리는 간판은 있지만 황정욱의 묘역을 알리는 간판은 보이지 않는다.

황희정승의 묘역으로 들어가기 전, 4차선 큰도로 옆에서 금승리로 들어가려면 금승리 노인정 앞을 지나야 한다. 경로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건물 뒤쪽 논 옆으로는 시멘트 포장길이 있다. 이 포장길을 따라 100미터를 들어가면 오른쪽을 거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황정욱의 묘를 만난다. 신도비는 아래쪽 계곡에 있다.

황정욱(黃廷彧,1532~1607(중종 27∼선조 4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字)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으로 명종(明宗) 7년(155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관(史官), 승문권지(承文權持) 등을 거쳐 1580년(선조 13)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87년(선조 19)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90(선조 23)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 및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하고 관북지방으로 피하였다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권유문을 쓰라는 협박을 거절하였으나,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 때문에 아들 혁(赫)이 대신 작성하였다. 이 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1597년 석방되었으나 복관(復官)하지 못한 채 죽었으며 뒤에 신원되었다. 시·서예에 능하였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묘역은 황정욱과 정경부인 순창 조씨의 합장묘로 봉분과 묘표석, 상석, 향로석, 문인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50여 미터 아래에 비각을 세우고 안치하였는데 높이 3m, 폭 1m의 규모로 비문은 홍서봉(洪瑞鳳)이 글을 짓고 썼다.

황정욱의 묘역은 기울어진 산자락을 펴고 인작으로 평탄하게 만들고 사용하였다. 풍수에서 말하는 혈이란 자고로 혈상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운 땅에서는 혈상이 갖추어지기 어렵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기맥을 일러 달리는 지각이라 칭하였다.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으니 편산이요. 계곡과 능선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으니 병룡이다. 지나치게 넓고 용이 분명하지 못하니 이는 전형적인 비혈이다.

눈여겨 볼 것은 묘역 앞쪽이다. 지각이 뻗어나가 안산을 이루었는데 현재 후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아무래도(설사 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묘역을 조성하기에는 앞쪽의 과협이 이루어진 안산이 적격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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