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를 찾아서

  • 관산일정
  • 관산기
  • 포토갤러리
  • 관산자료실

관산기

제목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택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7-04 조회수 764
첨부파일
내용
안동은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는 물론이고 보물도 지천에 널렸다.

의성김씨는 역사를 이루어 내단한 명성을 지닌 가문이다. 흔히 학봉선생으로 대별되는 이 가문의 종택도 안동에 있다. 의성김씨 종택은 안동의 동단에 치우친 방향에 있으며 안동댐과 임하댐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시에서 동북쪽에 있는 임하 댐 방향으로 10km 쯤 가다가 보면,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을 만나게 된다. 이 길은 안동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도로인데 34번 국도다. 안동시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을 건너 약 10여키로를 달리면 강가에 자리한 마을이 천천리마을이다.

안동에서 낙동강과 갈라지는 반변천을 따라 오르면 만나게 되는 이 마을은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룬 마을이다. 반변천은 영양에서부터 흘러내려 임하호를 이루고 낙동강과 합해지는 제법 큰 지류이다. 이 맑은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강가에 이르게 되고, 그 왼쪽으로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 곳이 바로 의성 김씨 종택이 있는 내앞(川前)마을이다. 물가 앞에 있다고 해서 예부터 그렇게 불려 오고있다.

보물 450호인 의성김씨 종택. 의성김씨 종택이 자리한 내앞 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봉화 닭실 마을과 함께 우리 나라 마을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터로 손꼽는 4대 명당 가운데 하나다.

달리 의성김동주 가옥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의성김씨 종택은 국도변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마을 전체가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양반가의 마을이다. 뒤로는 산이 받치고 앞으로 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풍수의 잇점을 가지고 있다.

내앞마을이 이렇게 명당 터에 자리 잡은 덕분인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 있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내앞 의성 김씨 집안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 종택에서 태어난 조선 선조 때의 선비였던 학봉 김성일(1538-1593)선생 때문이다. 학봉 선생은 일본에 다녀와 일본이 한국을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여 판단의 착오를 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진주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의성 김씨 종택은 원래 학봉 선생의 할아버지인 김예범 어른이 지은 것을 학봉의 아버지 김진(1500-1580) 선생이 일부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집은 1587년에 불타 없어지고, 그 뒤 학봉 선생이 손수 설계하고 감독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ㅁ자형 안채, ㅡ자형 사랑채, 그리고 행랑채와 부속채가 서로 이어져 전체적으로 사(巳)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동시 금계리에 자리하고 있는 학봉종태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장황하지 않은 구조를 지닌 이 가옥은 끊어진 곳이 없이 안채, 사랑채, 행랑채, 부속채가 서로 이어진 사(巳)자형 평면을 지니고 있다. 이는 지극히 풍수적인 배치임을 보여주고 있다.

의성 김씨 종택은 완사명월형이라 부르는 형국으로 다섯 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며 또한 후손들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맞서며 독립 운동을 하였고,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특이한 것은 구조이다. 사랑채는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갈 수 있는 별도의 문으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종택이라서 집안 큰일로 일가 남자 어른들의 사랑채에 드나듦이 잦게 마련이므로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드나들도록 배려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 칸에 측면 2 칸으로 된 규모가 큰 건물이다. 사랑채의 넓은 대청마루는 집안에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거나 집안 어른들이 회의를 할 때 사용하고, 또 관례, 상례, 제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제사 때 주로 쓴다고 하여 “제청”이라고 한다. 대청마루 서북쪽 언덕 위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을 갖춘 종가의 경우 대부분 건방(乾方)이나 간방(艮方)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오행과 팔괘상 서북방이 가장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집 안으로는 행랑채의 대문을 통해 드나들도록 동선이 연결되어 있다. 이 대문을 들어오면 사랑채, 안채, 부속채로 둘러싸인 길쭉한 마당이 나타난다다. 흔히 샛마당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여기서 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 마당 왼쪽으로 길게 늘어선 2 층 건물은 사랑채와 행랑채로 이어지는 부속채이며 오른쪽으로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한 건물은 안채이다. 부속채의 위층은 서고로 사용되며 사랑채로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와 같은 2 층 구조는 보통 사찰의 만세루나 범종루와 같은 구조로 쓰이는데 살림집에서는 보기 드물다. 이것으로 보아 학봉선생은 뛰어난 학문을 지닌 유학자이나 불가의 건물이나 정자에 대한 식견이 높았을 뿐 아니라 심미적인 지식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작은 마당 둘레로 대청, 안방, 태실, 상방, 고방, 부엌 등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다른 한옥과 달리 이 집의 안방은 안채 바깥쪽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와 같은 배치는 기의 흐름을 따른 것으로 보여지며 특히 태실을 따로 든 것은 양동마을의 서백당과 같이 기가 강한 곳에 배치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안채는 오랜 세월 동안 살면서 고치고 덧붙여 지은 건물이다. 안채 대청마루가 세 개의 다른 높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어떤 배려 때문이 아니고 여러 번 고쳐 지은 탓이다. 많은 식구들이 식사를 하거나 모여 앉을 때 바닥 높이가 다른 대청마루에 서열이나 신분에 맞게 자리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또 안채 대청마루 모퉁이에 있는 산실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방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이 방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는 방이라고 해서 태실이라고도 한다. 굳이 태실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평면을 나눈 것이 아니라 이 가문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 들어오거나 기가 모이는 곳, 혹은 지기가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철저하게 풍수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따로 없어 외부 사람들이 쉽게 안채로 들어갈 수 없도록 조성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당혹스럽다. 즉, 보통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거나 최소한 쪽문이라도 있다. 그러나 의성김씨 종택은 문이 보이지 않는다. 잘 살펴보면 안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엌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해야 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조선 시대에 남녀의 공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구분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의성김씨 종택은 명당지에 자리한 고택으로 배치의 묘미가 전형적임을 보여준다. 특히 내앞마을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마을 앞에는 내가 흐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배산임수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마을 앞을 큰 내가 돌아가는데 지도로 확인하면 사부란재에서 시작하여 마치 커다란 부채를 펴듯 물이 돌아가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땅이 물에 의해 보호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