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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읍취정과 모감주나무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7-04 조회수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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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안동에서 영덕방면으로 향하는 3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용상동이 끝나는 지점에서 급하게 길을 꺾고 서있는 선어대를 지나게 된다. 도로가 강가에 붙어 대(臺)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름하여 안동 제일경을 거느리고 있는 곳이라 한다.

선어대에서는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반변천 줄기가 선어대 깊은 품에서 잠시 쉬었다가 휘돌아 서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여기저기 토사가 쌓여 형성된 강섬이 갈대와 버드나무를 머리에 이고 부는 바람과 흐르는 물살을 견디고 있다. 이 굽이 사이에 문화재로 지정된 모감주 나무가 있다.

모감주 나무 뒷산이 선어대이다. 선어대는 안동시에서 영덕방면으로 국도 34번을 따라 맛뜰을 지나 용상이 끝나는 지점 우측 강나루에 있다. 도연을 스쳐 흐르는 반변천이 이곳에 와서 무협(巫峽)산의 절벽을 드리받고 용솟음치는 물살로 움푹 패인 깊은 소(沼)가 바로 선어연이다.

여기를 일러 사람들은 선어대(仙漁臺)라고 부르고 있다. 이 소(沼)의 확실한 명칭은 선어연(仙漁淵)이다. 대(臺)를 두고 말할 때는 무협대(巫峽臺)라고 해야만 옳다. 그러나 굳이 선어연 만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선어대(仙漁臺)라고 하는 것은 연(淵)과 대(臺)를 포괄적(包括的)으로 이른 말로 이해(理解)하면 별 무리는 없다.

옛부터 경치(景致)가 아름다워 안동팔경(安東八景)의 하나로 ‘선어모범(仙漁暮帆)’ 또는 ‘선어대하은어비(仙漁臺下銀魚肥)’라 하였다. 더욱이 전설(傳說)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소(沼)에는 명주 실꾸리 하나를 풀 정도(程度)라고 하였으니 물의 깊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영가지(永嘉誌)는 기록(記錄)하여 선어연은 안동부에서 동쪽 10리 소을마촌 서쪽 송항(松項) 아래에 있는데 백장심연(百丈深淵)으로 여기는 교룡(蛟龍)의 굴택(屈宅)이 된다. 그 위에는 용단(龍壇)이 있어 날이 가물 때에 여기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영험(靈驗)이 있는 곳이다.

특히 대(臺)에 연결된 북쪽 무협산(巫峽山)은 안동부(安東府)의 읍거지(邑居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안동의 형국(形局)은 행주형(行舟形)이다. 백문보(白文寶)는 영호루(映湖樓)의 금방기(金榜記)에서 <무협이 좌청룡 (左靑龍)이요 성산(城山)은 우백호 (右白虎)인데 물은 돌아서 호수(湖水)를 이루고 그 또한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흘러가니 마치 저 하늘의 하한(河漢)과도 같다>라고 하였다. 또 영가지(永嘉誌)는 이곳 선어연에 내외교(乃外橋)라는 다리가 있다고 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선어대(仙漁臺)에서 무협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읍취정(揖取亭)이란 정자(亭子) 하나가 있다. 이 정자는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께서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그 밑 도로변에는 지방기념물 제50호 <모감주나무>가 있는데 수령은 약 370년이며 높이는 15m로 경남, 경기, 황해도에서 자라는 나무이므로 안동에서는 매우 희귀(稀貴)한 수종(樹種)이다. 이 나무는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로 있던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선생이 1650년 송천에서 별세하자 선어대 뒤편에 안장(安葬)하고 상주(喪主)인 아들 3형제가 영양군 연당의 자양산(紫陽山)에서 3그루를 가져와서 심었다. 안동-영덕간 도로(道路) 확장공사(擴張工事)로 2그루는 없어지고 지금은 1그루만 남아있다.

정자(亭子)라 하면, 풍광이 수려한 강가 절벽이나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산 속에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다. 정자 문화에서 발원된 정신은 한결같이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읍취정은 새로 지은 듯하다. 그런데 칼날 같은 게곡에 자리하고 있으니 바람과 물의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상주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오래 묵으면 해를 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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