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를 찾아서

  • 관산일정
  • 관산기
  • 포토갤러리
  • 관산자료실

관산기

제목 신세동칠층석탑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7-04 조회수 539
첨부파일
내용
탑은 범어(梵語)의 스투우파(Stupa), 또는 팔리(Pali)어 투우파(thupa)의 음사에서 유래된 약칭으로 사리의 봉안 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제(차이티야, Chitya)라고 하는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 를 봉안한 탑을 스투우파 라고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탑을 차이티야 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

스투우파는 방분(方墳),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 (高顯處) 등의 뜻으로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영묘(靈廟), 정처(淨處),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탑은 사리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최초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열반 후 화장을 함으로써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 바로 탑파, 불탑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의 무덤이다.

초기에는 근본되는 여덟 탑이 중심이 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탑파의 신앙은 더욱 왕성하여 수많은 탑을 쌓게 되었다. 특히 아쇼카(As ka)왕의 팔만사천탑 건립은 역사상 유명한 일이며 불도들의 종교적 염원에 따른 사리 분배에 의해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에서도 수많은 탑의 건립을 보게 된다.

인도에서 출발한 탑파미술은 그 전파국에 따라 각기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불상과 같은 엄격한 규범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 즉 불교가 전파되는 각국의 건축기술에 따라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그대로 탑파 건축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인도의 탑이 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복발(覆鉢)형 불탑임에 비하여 중국을 위시한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한결같이 여러 수를 지닌 중층(重層)의 탑으로 전개되어 중국에서는 목탑이 주류를 이루었고 한국에서는 산하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주재로 하여 수많은 석탑을 만들었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어 층층히 쌓아올린 탑으로 우리나라 전탑의 시조는 비록 전탑은 아니지만 신라 선덕여왕3년(622)에 돌을 벽돌처럼 잘라 축조한 경주 분황사모전석탑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탑의 축조에 벽돌을 많이 이용하여 일찌감치 전탑이 조성되었고 인도에서도 초기에 불탑을 세울 때 벽돌을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중국에는 가장 오래된 전탑으로 남북조시대인 북위효명제 때인 정광4년(523) 에 건립한 숭악사십이각십오층석탑에서 벽돌을 많이 사용했던 용례만이 남아 있다.

분황사모전석탑이나 『삼국유사』에 양지가 전탑을 하나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7세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전탑축조에 대한 인식이 이미 존재하였다고 하겠으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실제로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전탑이 축조되고 있었다.

현존하는 전탑은 경북 안동의 신세동칠층석탑등을 비롯하여 제천,안동,의성,영양 등지의 곳곳에 모전석탑과 더불어 십여 기의 전탑이 남아 있는데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부지역에서만 전탑과 모전석탑이 축조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전탑의 형식적 특징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낮은 단층기단에 비대한 초층탑신을 올리고 여기에 감실을 마련하여 출입문을 내고 있으며 더러는 후대에 들어 지붕에 기와를 입히고 있고 2층 이상의 탑신은 높이가 급격히 감소되어 촘촘히 층을 올리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탑 전체를 모두 벽돌을 사용하지 않고 기단, 감실, 또는 초층탑신의 일부에 석재를 사용하고 있어, 비록 전탑을 지으면서도 석재에 대한 미련을 전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 전탑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 건립된 충북 제천 장락동칠층모전석탑, 강원도 정선의 정암사수마노탑,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다층전탑 등의 모전석탑과 전탑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탑 앞으로 기찻길이 있어 위험천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동이라는 지역이 워낙 문화재가 많은 곳이니 모두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진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