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중심부에서 안동댐을 향해 가다보면 법흥교 부근에 신세동7층전탑 부근에 임청각 군자정이 있다. 물론 도로 입구에 간판이 있어 둘어서기가 편하다. 굴다리는 지나치게 작아 차가 다닐 수 없다. 허리를 굽힐 정도는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허리를 급히게 만드는 이 굴다리로 들어가면 바로 우측으로 임청각이 나타난다.
2007년 현재는 공사중이다. 다만 군자정만이 공사를 피하고 있다. 문화재는 복원하고 보호하는 것이 진리이다. 목재로 지은 집이 아무리 튼튼하다 한 듯 세월이 지나면 좀이 먹고 썩을 것이니 고치고 수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 고향에서 은거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중에서 임청각의 고성 이씨 후손들은 정치와 단절하고 새로운 가풍을 만든 대표적 가문으로 꼽힌다.
안동에 터를 잡은 이증의 부친 이원(1368~1429)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세조가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의 아들 이증은 고향을 떠나 안동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이어 이증-이굉-이용으로 3대에 걸쳐 벼슬을 사직하고 귀거래사를 실행했다. 주목되는 점은 그로부터 5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벼슬 대신 이들이 선택한 것은 자연과 함께 지역민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었다. 관직에는 나 아가지 않았지만 지역민들에게는 더욱 존경받는 가문으로 회자됐다. 그럴수록 ‘가격(家格)’은 올라갔다. 더욱이 석주 이상룡 등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다른 가문에 비해 두드러지는 게 있다. 이 가문 출신 여성의 활약상이 눈부시다. 먼저 달성 서씨를 굴지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 인물로 약봉 서성(1558~1631)을 들고 있다. 약봉은 6도관찰사와 판서를 역임해 ‘행정의 달인’으로 통했다. 약봉을 키운 이가 고성 이씨 어머니다. 특히 약봉의 어머니는 남편이 23세로 요절하자 한양으로 이사하면서 자녀 교육에 앞장선 조선시대에는 보기 드문 여걸이다.
석주가문은 풍산 류씨 가문과 각별하다. 서애의 형으로 대학자인 류운룡의 부인이 이용(이명의 손자)의 딸이다. 고종 때 영남인으로 270여년 만에 재상에 오른 류후조(서애 류성룡의 3남 류진의 7세 종손)의 외가도 다름 아닌 임청각이다.
고성 이씨 가문의 어머니는 자신이 살던 임청각의 ‘우물방’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장차 재상이 될 것이라는 ‘가전(家傳)’에 따라 친정으로 와 해산을 했다. 우연하게도 약봉 서성, 매헌 류후조, 석주 이상룡 등 세 명의 재상급 인물이 우물방에서 태어났다.
이 밖에 세종 때의 학자로 서거정의 스승인 유방선의 부인은 좌의정을 지낸 이원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제봉 고경명의 장남인 고종후의 부인도 이명(이증의 셋째아들)의 증손자 이복원의 큰딸이다. 또한 임청각의 안주인은 안동 권씨, 의성 김씨, 김해 허씨, 파평 윤씨 등 명문가에서 왔다. 당대 최고의 명가끼리 혼맥을 형성해 온 것이다.
임청각은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해 왔다. 이는 임청각 후손들이 지역사회의 신망을 잃지 않으면서 동고동락한 가풍의 힘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나 지금이나 인재는 권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임청각의 애환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임청각은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大宗宅이다. 세칭 99간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사랑채·사당·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正寢인 君子亭 마루에는 지금도 퇴계선생의 친필액자가 걸려있고, 정자 아래로 보이는 方塘에서는 담박한 선비의 취향마저 풍긴다. 고가의 규모와 격조가 이러했기에 한 때는 안동 선비들의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했고, 안목이 무척 까다롭다던 일본인들로부터는 국보지정(303호)까지 받았다. 임청각은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난의 민족사는 임청각으로 하여금 유한공간으로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임청각은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었고, 무언의 노력 속에 독립운동사의 뒤편에 묻힌 새로운 이력 하나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石洲 李相龍(初名 象羲)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선생은 바로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이며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는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천적 지성이었다.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이 강행되었다. 비보를 접한 석주는 서간도 망명을 결심하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사유를 고하였다. 분주한 망명이었지만 집안의 종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여 방면하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으니, 안동의 유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석주는 가족들을 데리고 비장한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었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석주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13년 6월 석주의 외아들 이준형이 갑자기 귀국했다. 임청각을 매매하기 위해서였다. 석주는 임청각의 매매 대금으로 독립자금을 충당하려고 아들을 보낸 것이었다.
매매증서에 따르면, 임청각이 매매된 날자는 1913년 6월 21이었고, 매매대금은 900원이었다. 가옥의 규모에 대해서는 瓦家 4棟으로만 표기되어 있고, 間數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다른 문서를 참고한 결과 당시 임청각의 규모는 68간으로 확인된다.
매도인은 中華民國 懷仁縣 恒道川에 거주하는 李象羲였고, 매수인은 안동에 사는 李鍾夏 등 3인이었다. 문서상으로는 이상룡이 직접 매매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소유주일 뿐이고 매매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아들 이준형이었다.
결국 석주는 민족과 집안의 갈림길에서 민족을 택했고, 그러한 의지는 임청각의 매도로 나타났던 것이다. 독립을 향한 열정과 신념이 아니고서는 이런 결정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석주는 1932년 생을 마감함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그의 정신은 독립운동에 활력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한편 임청각에는 임청각매매증서와 같은 날에 작성된 문서인「택지급산판매매증서」가 있다. 이 문서는 임청각의 택지와 임청각 주변의 산판을 매매한 것인데, 매매대금은 100원이고, 매수인 역시 동일하다.
결국 석주는 임청각과 주변의 택지와 산판을 1000원에 매매하여 이를 독립자금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석주의 활동이 활발할수록 일제의 보복도 강화되었고, 후손들의 삶도 어려워져 갔다. 일제는 중앙선의 개통을 명분으로 임청각의 상당 부분을 헐어버렸고, 그 앞으로 철길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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