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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성일묘와 조상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7-04 조회수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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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안동시 중심부에서 와룡면을 거쳐 도산면으로 이어지는 35번 도로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서지리가 나온다. 이 마을로 들어가 개천을 따라 약 100미터를 가면 서지재사가 나오고 다시 50미터를 가면 오른쪽 산 아래 신도비각이 있다.

신도비는 학봉선생 묘소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비각(碑閣)을 지어 수호하고 있다. 신도비각은 묘소 아래 30m 거리에 있으며, 비문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이 지었다.

신도비의 귀부(龜趺)는 화강암을 거북모양으로 조각하였고, 비신(碑身)도 역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신의 높이는 213cm, 넓이 108cm, 두께는 37cm이며 이수의 높이는 80cm로 용무늬와 구름무늬를 새겼다. 글씨는 화천(華泉) 이산뇌(光海君時 名筆) 공이 썼다.

1664년(현종 5) 음력 9월에 세웠는데 사림(士林) 수백여 명이 수비전례(竪碑典禮)에 참석하여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신도비는 묘소의 오른편에 있는 묘방석(墓傍石)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1999. 12. 30)로 지정되었다.

신도비에서 30미터를 오르면 학봉의 묘가 있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류성룡 저, 국보 제132호)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당시 유성룡도 안동이 고향이고 모두 이황의 제자로 사승이 같으며 동인으로서 집권세력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의심의 여지는 있다. 아무리 민심이 걱정된다 하더라도 국운이 걸린 일이고 보면 민심을 걱정하여 거짓을 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威儀)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면 일본은 남아도는 힘을 외부로 표출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으니 외교가 아니라 국력을 키웠어야 했다.

학봉 선생의 일생을 알려면 우복 정경세가 지은 신도비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의 책 한 권 분량이라 쉽지 않다. 요약한 글로는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의 학봉 묘방석(墓傍石)에 적은 글이 있다. 묘방석이란 무엇인가? 창석 이준이 지은 글에 답이 있다.

"사순(士純)의 휘는 성일(誠一)이니, 문소(聞韶, 義城의 古號) 김씨이다. 무술년(1538)에 출생하여 계사년(159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년(1592)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 왕의 위엄과 교화를 멀리 전파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는 지성으로 감동하여 한 지역을 막았으니 충성은 사직에 남아 있고 이름은 역사에 실렸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배웠으며, 덕행과 훈업은 모두 길이 아름답게 빛날 만하다. 만력 기미년(1619)에 한강 정구 씀."

"선생을 장사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터인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자 시호에다 충성 충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義兵)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운명할 때에 참모들이 약물을 들이자, "나는 약을 먹고 살 수 없는 몸이다. 제군은 그만 두라"했다.

대소헌 조종도와 죽유 오운이 병문안을 하면서 "명나라 구원병들이 승승장구하여 남하해 이미 서울을 수복했으며, 그래서 모든 왜구들을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라 하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다니…. 그러나 그것 또한 운명인데 어찌 하겠나. 적들이 물러가면 회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붕당은 누가 혁파할 것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처사요 심사원려(深思遠慮)한 태도다.

학봉은 타고난 시인이며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다. 그가 남긴 시가 대략 1,500여 편이나 되는데, 다수의 애민시(愛民詩)도 남겼다. 그 대표작이 모별자시(母別子詩)로 60구(句)나 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장편인데 39세(1576, 이조좌랑) 때 썼다. 세상을 버리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로서 산청(당시 山陰縣)에서 안동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의 사연은 절절하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궁금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되면 도적들이 달려들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지 염려 마오.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고 해도 음식조차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하지 못하네. 그리워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석이(버섯의 일종) 두근, 석류 20개, 조기 두 마리 보내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에 호계서원으로 바뀌었다 훼철)과 임천서원, 전남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경북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경남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지에 배향되었다.

문집 10책이 남아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발간되었다. 종택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56종 261점)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906호(17종 242점)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서산 김흥락 선생의 목판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묘소는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서지리(西枝里) 무은산(茂隱山)에 있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1592) 10월 진주성(晋州城)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여 진주대첩의 공적을 이룩하고 난민과 백성을 구휼하기에 진력하였다. 이듬해 1593년(선조 26) 4월 29일 진주성에서 순국하니 지리산(智異山)에 임시로 모셨다가 그해 11월에 안동으로 운구하여 12월에 현 위치에 안장하였다.

김성일 묘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대략적으로 하면 묘방석에 의한 이야기인데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김성일의 묘를 수축할 때 서울에서 지사를 불렀는데, 지사가 늦게 도착했다. 문중에서는 가문의 위엄도 있었으므로 홀대하고 급히 산으로 불러 묘자리를 잡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지사는 불쾌했으리라.

지사는 묘터를 조영하며 마지막으로 돌을 빼내는데,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그 돌을 빼어내자 기가 다 빠져버려 땅의 기운이 모두 쇠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전설은 또 있지만 김성일의 묘에도 전한다.

일찍이 김성일의 묘가 명당이라 들었지만 2007년 7월 우중에 찾아보니 역시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돌을 빼내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 묘가 명당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 해야 할 것 같다.

음택을 판별할 때는 형기풍수에 의지하는 것이 속성인바, 가장 중요한 것은 혈장이 이루어졌는가를 판별하는 것이다. 혈장이 이루어지려면 고유의 혈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전형적으로 산진처에 자리를 잡는 혈상은 유혈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지나치게 경사가 심하면 혈상과는 거리가 멀다.

예로부터 오대불가장지라는 말이 있다. 묘를 조영하지 못하는 다섯가지 조건인데 이중에 과산과 편산이 속한다. 이는 기울어진 능선과 좌우가 맞지 않아 기울거나 지형이 균형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김성일의 묘는 지나치게 기울어져 과산에 해당하며 좌우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전형적인 과산에 편산인 셈이다.

무릇 음택을 파악하고 판별하며 관산을 통해 공부를 할 때는 인물됨이나 명성에 구애를 받지 말아야 한다. 묘의 주인이 영웅이라고 묘역도 명당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묻힌 묘역도 철저한 기준으로 따져야 한다.

눈여겨 볼 것은 상부의 묘역이다. 학봉의 묘역에서 약 30미터를 올라가면 두기의 묘역이 있다. 두기의 묘역중 상부의 묘역이 좀더 크고 새로 만든 비석이 세워져 있다. 통훈대부로 시작되는 이 묘는 학봉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지재사의 관리인 말에 따르면 학봉의 14대 조상이 될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 눈여겨 볼 자리는 바로 이 묘다. 바로 겸혈(鉗穴)의 혈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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