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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교적 온화한 장윤덕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7-04 조회수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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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예천 보문사 부근에는 한말의 독립운동가 장윤덕(張胤德)의 묘가 있다. 보문사에서는 약 500여미터가 떨어져 있는데 초행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 밭으로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산허리를 돌아 밭이 있고 그 너머의 산자락 끝에 묘역이 있다.

장윤덕 의사는 경북 예천군에서 안동 장씨 장재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워 예천군에서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국민들에게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반역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경고로써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7년 4월에는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원흉인 이또오히로부미를 비롯한 매국적신들을 살해하고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피신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의병대장 이강년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장윤덕 의사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 대장 휘하에 합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 봉화, 문경, 용궁, 예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7월 9일에는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조원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그해 8월 27일에는 의병 300여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또한, 9월 3일에는 문경읍을 습격,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인의 가옥을 소각시켰으며, 10일에는 이강년, 민긍호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면 갈평리에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적 3명과 한인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에도 예천읍을 습격하였음은 물론 16일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을 습격, 일경의 자위단과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중 대구수비대에서 대위가 1개중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 의사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당하여 3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묘역은 유혈의 혈상을 구비하고 있다. 전형적인 혈상에 인작을 가해 돋은 흔적이 있으나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입수룡은 조금 약하나 비룡형으로 조영되어 그기맥을 잘 보전하고 있다.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묘역에서 50여미터 떨어진 입구 방향에는 작은 산자락이 사두혈을 조영하였는데 소나무가 너무 자라 잔디가 죽어 황폐화된 모습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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