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진법읍 장현리 진접농협 뒷산에 자리한 영빈묘 부근에는 국어학자로 알려진 최현배의 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빈묘의 백호자락에 해당하는 곳이다.
개울가에서 산을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면 외솔 최현배의 묘가 나타난다. 최현배의 묘 아래에는 아들 최영해의 묘가 있다. 최영해는 일제시대 조선일보에서 아버지의 말에 따라 교정부에서 일을 했다.
아들 최영해의 묘를 거쳐 올라가면 삼태기 모양으로 사성을 두룬 최현배의 묘가 있다. 아래 우측에는 사각형 기둥 모양을 지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최현배((崔鉉培 1894∼1970))의 호는 외솔. 국어학자이며 경상남도 울산(蔚山) 출생이다. 아버지 최병수와 어머니 박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김두봉의 권유로 1910년부터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5년 졸업 후 1919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광도고등사범학교)] 문과 졸업, 1920년부터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2~25년 교토대학[京都大學]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1925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경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6∼1938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고, 또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8·15까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5∼1954년 문교부 편수국장을 2차례 지냈다.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후 그해 9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재직했다. 이때 국어 교재의 편찬과 교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큰사전〉을 편찬하는 등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몰두했다.
1954년 연세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부총장을 거쳐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1949년부터 20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내고, 1957∼1968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 등 국어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지내며 국어학 연구, 국어정책 수립, 교육학 연구 및 한글운동에 전념하여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한글학회의 중추로서 한글전용·국어순화 등 실용적인 어문 활동에 힘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어학 분야 연구는《우리말본》,《한글갈》,《한글의 투쟁(1958)》,《한글만 쓰기의 주장(1970)》,등의 저서로 집약된다.《우리말본》은 주시경 이래의 문법연구를 계승,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 문법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한글 전용, 한글가로쓰기운동,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우리말 큰사전》편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밖에《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1927)》,《나라 건지는 교육(1963)》,《조선민족 갱생의 도(道)(1930)》,《나라 사랑의 길(1958)》 등이 있다. 1955년 제1회학술원공로상, 1967년 5·16민족상 본상을 받았으며,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로로 이용하는 길목에 묘가 있다. 지형적으로 지룡이 계속해 내달리다가 이제 고개를 숙이고 점차 힘을 잃어버리는 지점이다. 기(氣)를 잃어버리고 산맥지지(散脈之地)로 변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혈장이 응결되지 못했고 산의 형태는 흩어지는 용맥으로 변하고 있다.
음택을 판별하는 요건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형기론에서는 용혈사수향(龍穴沙水向)을 그 근본으로 한다. 용익 건강해야 혈이 응결되고 혈이 응결되어야 올바른 진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현배의 묘역에 도달한 용은 이미 힘을 잃어버렸다. 용이 기를 잡지 못하고 흩어지는 곳에서는 혈이 결지되지 못한다. 혈이 결지되지 못하니 나머지는 살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사수향(沙水向)은 그 이후의 문제이니 말이다.
외솔의 묘는 사성이 지나치게 높다. 적어도 수십트럭 분량의 흙을 족히 사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사성이란 인공적으로 선익(蟬翼)을 표현하는 것이다. 선익이란 바로 바람과 물, 즉 원진수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적인 사성은 표피를 흐르는 물은 방어가 나능하겠지만 땅속을 흐르는 물은 막기 불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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