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산 78번지, 남선의 묘가 있는 곳이다. 남양주시 방향, 퇴계원 방향에서 47번 도로를 이용하여 진접읍 방향으로 가다가 광전리를 지나 우측으로 의정부로 이어지는 43번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타고 가면 전도치 터널이 나타난다. 전도치 터널을 지나 우측으로 나서는 길을 따라 43번 도로로 들어선 다음 약2킬로미터를 가면 우측으로 청학지구로 들어가는 길로 계속 가면 청학터널이 나오는데, 터널 입구 우측으로 제각이 보인다. 이 제각이 바로 남선의 제각이다.
청학지구 마을이 보이는 입구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산자락을 따라 도는 길 입구에 의령남씨 묘역을 알리는 커다란 돌이 세워져 있다. 이 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약 100여미터를 가면 제각이 나타나고 입구에 남선의 묘와 신도비를 알리는 안내 간판이 있다.
안내 간판에서 산길을 따라 가면 여러기의 묘가 있다. 산자락 아래로 묘가 있고 상부에도 2기의 묘가 있다. 상부 두개의 묘역중 아래의 묘가 남선의 묘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봉분이 덩그런히 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이는 남선의 묘가 아니라 남효의(南孝義)의 묘다.
아래쪽의 묘가 조선중기 문신인 남선(南銑: 1582~1654)의 묘다. 호는 회곡(晦谷), 대몽(大夢), 본관은 의령(宜寧), 무주현감(茂朱縣監) 복시(復始)의 아들로 어머니는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의 딸이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1606년(선조3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용인에서 살았다. 인조반정 후 태릉 참봉이 되었다가 호조좌랑, 사복시판관을 거쳐 고산현감을 지냈으며 1629년(인조7)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지평을 거쳐 이듬해 안악군수가 되었다. 이 후 해주목사, 황해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함경도병마절도사, 전라도, 강원도관찰사 등 여러 번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일을 바르게 처리하고 선정을 베풀어 부임하는 곳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다.
묘는 정부인 팔창도씨(八菖都氏)와 합장묘로 북동향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과 장대석, 향로석 문인석을 놓았으며, 월두형 묘표가 있다. 신도비는 대제학 김육(金堉)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원래 것은 한국전쟁때 파손되어 방치되고 있으며 현재의 것은 1990년 새로 건립하여 세웠다.
남선의 묘역 상단에 자리한 묘는 남효의(南孝義)의 묘다.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고 이미 글씨조차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 비석이 있다. 남효의는 생몰년 미상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중유(仲柔)이고 호는 지소재(志素齋)이다. 아버지는 회(恢)이며, 효온(孝溫)의 사촌동생이다.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생육신인 남효온의 족친이라 하여 오래도록 현달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1517년 함경도경차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 1521년 지평·장령을 거쳐, 1523년에 함경도군적경차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무처리를 잘못하였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곧 정언이 되고 1525년 사섬시첨정·보덕·사간을 거쳐, 1527년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참의·우부승지를 거쳐 1530년 대사간·전주부윤이 되었다.
153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가 되었다. 153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참판이 되었다. 1540년 대사헌이 되어 중종이 재야에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고 하자 정홍익(鄭弘翼)을 천거하였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고 1544년 형조판서를 거쳐, 뒤에 찬성(贊成)인 오겸(吳謙) 등과 같이 기영사(耆英社)에 들어갔다. 일찍이 대사헌이 되어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남곤(南袞)의 잘못을 상소하여 논하자 사론(士論)이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남효의와 남선의 묘는 심상하기 그지없다. 남효의 묘는 번듯하고 평탄하고 밝은 빛이 나며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이지만 남선의 묘는 기울어진 면을 인작으로 펴고 만든 묘임을 알 수 있다. 그같은 이치로 보면 남효의 묘는 명당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고 남선의 묘는 전순에 해당한다.
혹자는 이 묘역을 보며 지나치게 많은 인작의 흔적과 좌우의 균형을 논한다. 그러나 이 묘역을 판단하며 살펴볼 것은 입수룡이다. 입수룡이 직선으로 내려온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산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수룡에 암석이 있어 강한 기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인작으로 그 모습이 변했지만 과협처를 살펴보면 지금의 봉분이 애초의 높이에 다름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인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주변에 한하는 것이다. 우측으로 지각이 뻗어나갔는데 이는 선익이 발달한 것이다. 남효의 묘역이 혈판을 이루고 있음에 비교해 남선의 묘는 전순에 해당한다.
눈여겨 볼 것은 터널이다. 터널은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터널은 이 묘역을 판단함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표면에서의 깊이가 바로 기맥과 상관되는데, 절맥이 되었는지의 기준이 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