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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릉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7-25 조회수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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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장릉

장릉(章陵)은 사적 제 202호로서 조선 16대 인조(1623-1649)의 생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황후 구씨의 능이다. 능의 규모와 규격은 조선중기의 전형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고, 능 아래는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 있으며, 조선 21대 영조와 22대 정조가 매년 행차하여 제사를 모시던 건물이며, 능주위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서울에서의 교통도 편리해서 휴일이면 이곳으로 야유회를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번지.
장릉은 동구릉이나 서오릉처럼 광대한 영역은 아니나 산책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은 여건을 갖춘 곳이다. 경사지지 않은 깨끗하고 고운 흙길이 2km남짓 한데 갈참나무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능 언덕 아래, 관리실에서 능역에 이르는 길 옆에는 아담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가운데는 조그만 섬도 만들어 놓았다.

곳곳에 물풀이 보인다. 장릉에 습지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3공화국 시절 농사용 저수지를 만든 것이 지금은 그 가운데 인공섬이 숲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화를 이룬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애초부터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한다.

원종은 광해군대(光海君代)에 승하했는데, 인조 즉위후 대원군(大院君)으로 현재 위치에 흥경원(興慶園)으로 조성되었다가 인조 10년(1632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어 인헌왕후릉(仁獻王后陵)과 함께 장릉(章陵)으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개수(改修)를 한 것이다. 1637년(인조 5년)에는 능원에 불이 났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변의 금정사(金井寺)는 장릉의 원찰(願刹)로 자리잡아 오고 있다.

선조(宣祖)의 후궁들 중에서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에는 4명의 군(君)이 있었다. 사실 선조도 후궁 창진 안씨의 후손에 속한다. 아무튼 선조의 후궁에서 태어난 셋째 정원군(定遠君)이 인조(仁祖)의 아버지로 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된다.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기도 했던 정원군은 자신의 세 아들 중 1615년(광해군 7년)에 능창군(綾昌君)을 신경희 등이 왕위에 추대하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 능창군이 유배되어 사사(賜死)되는 일을 겪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내다가 1619년 40세의 나이로 승하해 양주군에 안장되었다.

3년 뒤 인조가 즉위한 후 대원군으로 추존되고 다시 원종(元宗)으로 추존되고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하여 장릉(章陵)으로 천장해 왕릉의 규모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는 좌찬성(左贊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태어나 3남{인조, 능원(綾原),능창(綾昌)군}을 두었으나 남편의 생존시에는 자식의 죽음을 보는 등 불우하게 지내다가 인조의 즉위를 말년에 보면서 기쁨을 찾아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고 인조 10년{1623년)에 원종(元宗) 추존과 함께 왕후로 추봉되었으나 역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정원군(定遠君)과 함께 추존되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구사맹의 묘는 남양주군 금곡동 부근에 있으며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주산은 낮지만 온화한 곳이다.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보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출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중출맥이 명당이라는 말은 아니다.

입수룡은 강하지 못하지만 어느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과협도 이루어져 있다. 약간의 인작이 가해졌지만 기맥의 흐름과 혈상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혈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사초지의 강(堈)이 불안하다. 장릉의 전순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전순은 둥근 금형으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형상을 지니는데 장릉의 전순은 길게 이어져 있다.

인작이 가해져 있어 그 모습이 변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의 형상이라면 전순이 보이지 않고 길게 이어져 정자각까지 늘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인작이 가해져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혼유석 앞 약 10여미터 앞의 단차가 전순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의 경우에는 이처럼 길게 뻗은 전순을 볼수 없다. 일반적으로 강(堈)이라고 부르는 이 둥근 형태의 당판은 산진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끝이 둥글게 떨어지는 전형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장릉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길어 설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더구나 장릉의 경우에는 바래기라는 풀이 지나치게 많이 자라고 있다. 바래기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풀이기에 장릉의 경우에는 수맥과 건수의 영향을 파악해 볼 수 잇는 곳이다. 더구나 바래기가 능역상부에 자라고 있어 원진수의 느낌도 받을 수 있고 건수가 능역속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잔디가 불규칙하게 자라며 때때로 줄을 만들 듯 불규칙하게 자라거나 짙은 색을 띠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잉이 아니고 수맥이나 건수의 영향일 수도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쇄는 매우 좋다. 해설사의 의견에 따르면 혹자는 내청룡을 일부러 조영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특히 장릉에 대한 자료는 극히 부족하여 어떤 역사적 사실의 기록도 부족하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청룡이 없었다 해도 교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능역이 금계포란형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 말도 이해가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반적인 금계포란형의 묘역이나 능역이라면 청룡이나 백호중에서 한자락이 안산을 지나 휘감아야 하는데 지금 모습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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