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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계 하위지 선생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8-12 조회수 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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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단계 하위지는 단종복위를 꿈꾸던 중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단계의 묘는 흔히 알려진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묘에 있는데 경북 구미시 선산읍 고방실 마을에도 단계의 묘역이 있어 의심을 자아낸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선생의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中章), 호는 단계(丹溪)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나, 세종 20년(1438)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호 ‘단계(丹溪)’는 그가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집 앞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구미시 선산읍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구미라는 인식이 흔히 공장지대이고 공업지대라고 하지만 선산이나 해평은 평야지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평야지대에서 단계 하위지선생이 출생하였다.

유허비는 선산읍 완전리 45-1번지에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단지 유허비가 산을 배경삼아 자리하고 있을 뿐이고 선생의 묘역은 죽장리에 있다.

선산읍에서 68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선산 나들목을 지나고 곧 우측으로 서황사를 지난다. 도로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마을 죽장2리 끝자락이 나타난다. 이곳에 단계 선생의 묘를 알리는 간판이 있다.

선산은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일찌기 조선의 인재 중 절반이 영남에서 났고 그 영남의 인재 중 절반이 선산에서 났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많은 선비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경제적 바탕이 바로 이 선산들판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인심도 곳간에서 나고 청빈낙도라는 말도 의식주가 충족된 후라는 말이 있다. 즉, 배가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선산은 들이 많아 풍족했으므로 학자도 있고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었다.

고려 광종 9년(958)에 우리나과에서 과거가 처음 시행된 후 선산 지방 출신으로 급제한 이가 대과만 해도 3백여명에 이르고 진사시까지 합하면 근 700여명에 이른다. 이 많은 선비 중 학문과 충절로 유명한 고려말의 야은 길재 선생도 선산읍 고아면 봉한리 출신이다. 길재 선생보다 59년 뒤인 태종 12년(1412)년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난 단계 하위지 선생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사육신으로 충절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위지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 읽느라 문밖에 잘 나오지를 않으니 이웃사람이 그 얼굴을 몰랐다 한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을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는 그를 도와 <역대병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선생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이 되자 성삼문 막팽년 유성원 유응부 이개 등 동지들과 상왕인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뜻을 모우고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김질이라는 자의 밀고로 가담자들이 잡혀 들어갔으나 선생을 비롯한 여섯 명의 선비들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참형을 당하기 전 세조는 선생의 재질을 아껴 회유와 고문을 거듭하였으나 끝내 죽음을 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동생과 아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신숙주가 뜻을 바꾸어 세조의 집권에 손을 들어 준 변절자였다면 하위지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지조를 택한 절개의 선비였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같이 논평한 바 있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여 졌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그의 호가 단계(丹溪)인 것은 출생하는 날부터 3일 동안 집앞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선산읍 서쪽에 단계천이 있고 단계교가 있는데 지금 선산읍을 통과하는 지점은 복개가 되어 있어 단계교도 다리로서의 역할은 없어지게 되었다.

단계교에서 2Km 거리의 죽장면 고방산에 묘소가 있는데 이 곳에는 선생의 의관을 묻었고 시신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에 묻혀있다. 선생을 향사하던 월암서원이 도개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월암정만 남아 있다. 비봉산 아래에 선생의 유허비(지방유형문화재 236호)가 있다.

단계선생은 鞠問(국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車裂刑(거열형)을 당했다.車裂刑(거열형)이란 소에 팔다리 네곳을 각각 밧줄로 묶은 다음 각기 네방향으로 서로 당겨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이들은 그렇게 죽으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세조에 대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질타와 꾸중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하위지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문을 받을 때 하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하로서 이제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 이 있습니까?"

선생의 묘역은 분명 노량진의 사육신 묘이다. 사육신묘를 만든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매월당(梅月堂)은 사육신 묘를 만들때, 성삼문(매죽헌), 유응부(벽랑), 성승(적곡), 박팽년(취금헌) 이개(박옥헌)의 두상을 묻어 묘를 만들었지만 이곳에 단계의 두상은 없이 허묘를 만들었다 한다.

혹자는 선생의 묘역이 매우 뛰어난 명당이라 말한다. 과연 그럴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간좌곤향을 한 선생의 묘는 窩形이라는 것이다. 와형에서 眞穴의 필수조건은 좌우의 현릉사(弦陵砂)가 뚜렷하게 감싸고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이 살아있는가 하는 것이다. 용맥이 살아있다는 말은 도저히 하지 못하겠다. 행여 용맥이 내려온다 하여도 이리저리 찢어지고 파헤쳐져 있으니 산맥지지요, 병룡이다. 혈은 고사하고 능선조차 희미하니 혈상을 논할 수 없다.

와형이라 하면 횡룡에서 입수하여야 하는데, 뒤쪽 주산에서 맥 같지도 않은 맥이 흘러내려와 흩어지고 있는데 무슨 형을 논하고 혈을 논한단 말인가? 아마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역적으로 몰린 선생의 묘역은 다급하고도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이루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니 좋은 땅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조언을 하자면 "묘역을 평가하고 살필때 묘역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시하고 평가하라.”다. 영웅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묘역이 모셔지는 것은 아니다. 단계선생이 비록 충신이라 하나, 충신에게 주어진 묘역이 충신의 이름처럼 대단하다는 선입견을 가질 이유는 없다.

애닯타고나 할까? 우거진 풀숲이 비록 소나무 울울창창 하여 절개를 보여주는 듯 하고 일부에서는 애써 명당임을 주장하려 하나 어느 묘역과 비교해도 뛰어난 바가 없고, 차라리 혈이 아니라 해도 옆 산의 능선에 모셔지지 못한 것 이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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