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군은 고구려 때는 생천군(牲川郡), 또는 야시매(也尸買)로, 통일신라 때는 낭천(狼川)이라 불리웠으며, 고려 성종 14년 역방도의 관할에 있다가 명종8년 춘주도가 설치됨에 따라 역방도를 폐하고 이의 관할로 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13년 현감을 두었다가 인조 23년에 폐현하고 지금의 금화에 있던 도호부 관할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복현되었으며 고종 39년 화천(華川)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화천읍은 화천군의 중심지이다. 화천읍은 화천군의 소재지로서 현내면(懸內面)이라 불리다가 고종32년(1895)에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였다. 이태조(李太祖)때는 낭천군(狼川郡) 군내면(郡內面)이라 하다가 그 후 낭천(狼川)이 화천(華川)으로 개칭되면서 화천면(華川面)으로 되었다.
화천읍의 중심은 상리와 하리이다. 이 중에 하리에 향교가 있다. 일반적으로 향교라는 건축물이 있는 곳이 과거로부터 그 마을의 중심이었다. 물론 나중에 지어지고 이건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향교가 있는 마을이 일대의 중심도시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향교를 알리는 간판이 있다. 향교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단촐하게 지어져 있으며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다. 화천향교는 1985년 1월 17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02호로 지정되었다.향교는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역대 지리지에 향교의 위치나 건물의 규모에 대하여 대략 기술하고 있을 뿐으로 창건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1735년 김시민(金時敏)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의 전사청(典祀廳)을 건설하고 외문루(外門樓)를 창건하였다. 1773년 조무(趙懋)가 명륜당을 중수하고 외삼문(外三門)을 중건하였으며 1786년 이재항(李在抗)이 향교를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대성전을 비롯한 교궁건물(校宮建物)이 불에 타버리고 남아 있던 문서들도 소실되었다. 1960년 이종석(李鐘奭) 등 관내 유림들의 주선으로 대성전과 내삼문(內三門)을 재건하였고 중단되었던 석전행사(釋奠行事)를 계속하게 되었다. 1963년 향교 주위의 분기(墳基)를 이장하고 담장 공사를 하였다. 1975년 전교(典校) 박제묵(朴齊默)의 주관으로 명륜당·제기고(祭器庫), 외삼문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 홍살문을 건립하였다. 향교는 외삼문을 마주보는 위치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이 있고 그 앞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이 있고 그 오른쪽에 제기고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공자·증자·자사·안자·맹자),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한국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향교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향교는 앞에서 바라보면 뒷집의 기와가 선명히 보일 정도로 경사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앞쪽에 자리한 외삼문 뒤어 명륜당의 지붕이 보이고 그 뒤에는 내삼문의 지붕이 훤하게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성전의 지붕이 보인다. 이와 같은 배치는 향교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기맥을 타고 있다. 화천향교는 기본에 충실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풍수이법을 따르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특히 기맥을 타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충족하며 청룡과 백호의 환포도 매우 튼실하다. 다만 몇 년전에 외곽도로를 내며 청룡의 끝자락을 잘랐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높은 곳에 있어 멀리 화천강이 내려다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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