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곡서원. 화성시 송산에서 서신 간 309번 도로를 타고 이동하다가 제부리, 궁평리 갈라지는 삼거리 입구에서 우회전하면 안곡서원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길에서 가까운 곳이다.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585번지에 자리한 안곡서원은 매우 포근한 지세에 파묻혀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이자 향촌자치 운영기구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시에는 모두 3개의 서원이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명고서원과 매곡서원은 소멸되고 현재 안곡서원만 남아 조선시대 화성지역 서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곡서원은 1616년(현종 7) 남양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민시중(閔耆重)이 지방유림의 공의에 따라 기묘명현(己卯名賢) 도원재(道源齋) 박세희(朴世熹, 149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안곡사(安谷祠)를 건립하고 그의 위패를 모셔 향사(享祀)한 데서 시작되어 2년 뒤인 1668년(현종 9)에는 송촌 박세훈을, 그리고 1697년(숙종 23)에 인재(忍齋) 홍섬(洪暹)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1721년(경종 1) ‘안곡’이라는 사액을 받아 정식 서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6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곡서원에 처음 배향된 박세희는 중종 때의 문신으로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7년 정언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519년(중종 14) 좌부승지로 재직하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로 분류되면서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기묘사화’는 반정으로 연산군을 재위에서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중종이 반정의 공신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사림들을 한순간에 정계에서 축출해 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신진사림을 이끌었던 조광조는 능주(綾州)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림들이 유배형에 처해져 귀양지에서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는데 박세희는 바로 이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다.
박세희의 뒤를 이어 안곡서원에 배향된 박세훈은 박세희의 백형(伯兄)으로 ‘주동의 효아(鑄洞孝兒)’라고 칭송 받던 인물이다. 박세훈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으로 소임을 삼았다. 154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양에 있는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를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나이 20세가 되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 하였지만 관에는 나가지 않고 다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널리 알려지자 조광조 등이 별과에 천거하였는데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다시 고향으로 귀향하고 만다. 그 후로 조정에서 제용감청정에 임용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초야에서 일생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배향된 홍섬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중종의 부마가 되어 전횡을 일삼는 김안로를 탄핵하다가 흥양에 유배되었다. 그의 대쪽같은 성미는 사사로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지 못하여 그 후로도 명종비의 외숙이었던 이량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되었고, 다시 복직되어 선조가 즉위 후 우의정에까지 올랐으나 남곤의 죄상을 탄핵하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幾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 번이나 중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을 뿐 아니라 검소하여 몇 번의 역경 속에서도 긴 정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저서로 「원분가」, 『인재집』, 『인재잡록』 등을 남겼다.
현재 안곡서원은 6칸의 사우와 신문(神門), 동서협문(東西夾門), 강당 4칸 그리고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는 정면 6.36m,측면 4.25m 규모이며 연등천장의 익공집에 맞배지붕 건물로 단촐하지만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건물이다. 강당은 정면 5.95m, 측면 3.8m의 규모로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민도리 집으로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 협실이 있다. 내부에는 ‘안곡서원중건기’, ‘안곡서원중건상량문’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주로 서원의 행사나 유림들의 회합,학문이나 예절 등을 강론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안곡서원에서는 지금도 매년 문중과 인근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 맞은편에는 수령이 수백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원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법칙을 지키고 있었고 청룡과 백호가 좌우로 늘어섰으나 앞이 열려 안산이 교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가깝게 막혀있어 수구가 열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안산이 조금 높아보였는데 그 모습이 늘어진 일자문성이다. . 일자문성이 늘어진 형상이, 혹은 지붕처럼 보이는 그 산이 고축사이다. 예로부터 고축사가 보이는 혈처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에게 급제자가 난다고 했다. 일자문성의 경우에는 극귀사에 속해 군왕까지 바라보는 것이니 늘어진 일자문성이라면 장원급제도 있을 수 있다. 늘어진 일자문성이 고축사라!
안곡서원 옆으로는 묘역이 있고 박세훈의 묘는 물론이고 그의 일가로 보이는 묘가 적지 않다. 자고로 음택이란 용혈사수향으로 말한다. 주산의 모양은 그럭저럭 갖추어졌으나 용이 드는 방향을 모르겠다. 지나치게 넓으니 이는 기맥의 흐트러짐이요, 기맥이 약하니 혈판이고 따질 이유가 없다. 혈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좌향이나 수세론, 사격론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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