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재는 군위군과 구미시의 경계지역이다. 땅재를 넘어 우측으로 작은 간판이 세워져 있고 ‘주륵사 폐탑’을 알린다. 1킬로 이상의 거리이다. 선산읍에서 59번 도로를 타고 북상하다가 우측의 낙동강으로 향하는 생곡삼거리 신호등에서 우회전하여 일선교를 지나 삼거리에서 상주방향 좌회전, 오르막을 지나 군위 소보 방향 우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왼편으로 다곡리 마을이 나타나는데, 마을 뒤편 산기슭에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다농이다. 청화산은 정상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언뜻 보면 전라도 마이산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마을 앞을 지나 고개가 시작되는 도로 좌측으로 산길이 있고 대략 450미터의 거리에 폐탑이 있음을 알린다. 작은 개울 건너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니 무너진 폐탑과 축대가 나타난다.
폐탑의 존재는 문화재의 방치, 혹은 도굴의 단면이다. 한국은 불교문화의 나라다. 전국 어느곳에나 불교 문화재가 있으며 절터에도 대부분 탑의 흔적이 납아있다. 1960년대에 파악한 바로는 남한 전역에 산재한 탑이 1000기가 넘었다고 한다. 최근 문화재청의 현황 조사 결과를 보면 불과 460기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짧은 시기에 반수 이상의 탑이 사라졌다. 없어진 탑은 대부분 야산에 방치된 것들이었다.
문화재를 훔치는 자들의 문제도 있지만 문화재를 관리하지 못하는 정부와 민족의식 없는 사람들도 문제다. 문화재의 멸실이나 붕괴, 혹은 유실에는 민족과 국가를 좀먹는 쓰레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공식적인 도굴시대인 일제시대는 차치하더라도 해방 이후의 도굴은 사회가 어수선한 1950년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최고조에 달했다.
탑이란 부처님을 대신하는 조형물로 출발하였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일종의 보호시설이며 상징물인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부처님의 사리대신 고귀한 보물이 함께 안치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삼국시대의 탑이나 고려시대의 탑에서는 어김없이 탑 속 사리공에서 진귀한 보물이 사리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를 노린 도굴범들이 한밤중에 장비를 이용하여 탑을 무너뜨리고 유물을 탈취하곤 했다. 문화재 당국은 망실된 탑들을 복원하기 위해 적잖은 수고를 해야 했다.
주륵사지 폐탑도 다르지 않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깊은 골짜기에 말없이 서있던 탑으로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큰 탑이다. 경주 석가탑에 버금가는 거대한 석탑이었다고 한다. 이 석탑을 도굴꾼들이 한밤중에 무너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행여 탑 밑의 땅 속에 유물이 있을까 철저히 파헤쳐 구덩이를 만들어놓았다.
수난을 겪은 탑들은 복원하기가 어려운 지경인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 이 주륵사지 폐탑의 경우 석재의 규모가 워낙 커서 복원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이 폐탑은 도개면 다곡리 다항 마을의 뒷산인 청화산(靑華山) 중턱 주륵사 절터에 있다. 석탑의 전체 규모는 탑 재료의 망실이 많고, 매몰된 것이 많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탑의 지붕돌을 통해 그 규모를 추정 할 수 있다.
탑의 크기는 초층 지붕돌의 추녀 폭이 236cm, 2층 지붕돌 204cm, 3층 지붕돌 175cm이며, 5단 받침의 최하 폭이 제1 지붕돌의 경우 144cm, 2층 지붕돌 124cm, 3층 지붕돌이 107cm로 큰 탑에 속하며, 큰 규모의 지붕돌임에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또 탑 아래 부분 기단의 폭은 358cm, 위층 기단 면석의 높이는 117cm이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이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의 큰 탑이다. 특히 탑을 세웠던 자리는 두개로 보이기도 한다. 한 곳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인위적인 보호시설을 해 두었지만 다른 한 곳은 그대로 방치되어 긁어 모아둔 형상이다.
주륵사에 대한 연구자료나 역사성은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화산의 웅장한 산세를 보아서는 산 건너편의 군위군 법주사와 비교하여도 작지 않을 것이다. 특히 웅장한 산세는 대가람의 요소를 충족하고 있다.
주륵사 페탑은 쌍탑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문화재를 관리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알 수 없지만 풍수를 익히고 배우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탑의 위치와 그 흔적으로 보아 쌍탑이 어울리는 지세다. 특히 탑은 기맥을 따라 내려오는 산등에 세워져 있으며 탑 뒤에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 풍수적으로도 매우 합당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앞쪽으로는 석축이 있어 나름대로 정지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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