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를 찾아서

  • 관산일정
  • 관산기
  • 포토갤러리
  • 관산자료실

관산기

제목 김좌진 생가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10-10 조회수 554
첨부파일
내용
충청남도 홍성에는 일본의 압제를 받던 시기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한 분들의 생가지가 있다. 김좌진 생가와 한용운 생가는 홍성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재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홍성 인터체인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나들목에서 나오자마자 만나는 도로가 29번 도로이다. 나들목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홍성 방향이고 왼쪽으로 나오면 갈산면이다. 갈산면에는 김좌진 장군 생가로 로 가는 길이라는 표시가 있는데 이 표시를 따라가도 되지만 조금 돌아가는 길이다.

사실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우국지사나 항일운동가, 혹은 3.1 만세운동의 선구자들 생가는 지난날 높은 관직을 지낸 관료들의 생가보다 가볍게 다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젠 이분들의 생가도 찾아보고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 또한 좋을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어떤 유적보다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 있다. 나름대로 복원을 했겠지만 과거의 생활상을 정리해 놓았다. 유물관도 있다. 주차장도 넓어 차를 세우기도 좋다.

1989년 12월 29일, 시도기념물 76호로 지정된 김좌진장군생가지(金佐鎭將軍生家地)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외 번지에 있다. 이곳은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후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했다.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홍성역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생가지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본채와 문간채,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뒷쪽의 김좌진장군 사당(백야사)은 1998년~2001년까지 재실,주차장을 조성하였으면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단지 산을 깎아 만든 점은 안타깝다. 자연을 살리며 사당을 만들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가옥을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이나 기본은 있다. 그 하나가 마을의 입지환경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마을의 입지와 산세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이 경우 조산을 따져보고 마을의 주산을 따져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마을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 기준은 교쇄를 이루어 살풍을 막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물이 있어 식수를 구하기 쉬운가 하는 점이다.

마을의 형상을 확인한 다음에는 마을의 입지를 패철로 판단한다. 이 기법은 공기의 흐름과 기의 흐름을 판단하며 교쇄를 바탕으로 하여 패철로 판단하는 것인데 여러 가지 학설과 이설이 있다. 흔히 팔십팔향법으로 따지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주변 산세가 얼마나 유정하고 해가 없는 지형인가를 따지는 일이다.

마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이 있는 자리다. 이 점은 음택과 동일하다. 마을의 입지가 아무리 좋아도 내가 살집이 한문(閑門)에 위치하고 있다거나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에 위치한다면 이는 좋은 집터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나쁜 지역이라 해도 집터가 용맥을 타고 있으며 직풍을 피하고 수침을 피하는 곳에 있다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령은 지령이라는 말처럼 지형의 영향을 받는다.

가옥의 가상을 따지는 일은 바로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좋은 지형이라면 더욱 좋지만 큰 문제가 없는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면 동사택과 서사택의 기준을 따져야 한다. 판단 기준은 대문(門)과 가옥과 건물의 주된 지점인 주(主)의 배합을 살핀다. 담이 있을 때는 대문이 문이며 담이 없으면 건물의 문이 문이다. 주는 가옥의 가장 중요한 곳으로 흔히 높은 곳, 꺾인 곳, 넓은 곳의 순서로 정하며 전통 가옥인 경우는 대청을 주로 본다. 현대 가옥은 사람이 사는 가장 높은 곳을 살핀다. 이 주와 문의 상관관계에서 동사택과 서사택의 배합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옛날 가옥에서는 부엌도 살핀다. 하지만 일체식이 된 현대가옥에서는 문과 주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어 가상(家相)을 살핀다. 가장 좋은 가상은 산을 배경으로 전저후고의 지형에 자리잡아 일조와 배수가 좋아야 한다. 또 수로의 유입이 없고, 대문과 집안에 큰 나무가 없어야 길하다. 방정한 부지에 건물의 크기가 알맞아야 하며 담장의 높이도 적당해야 한다. 또 대문과 사랑방 그리고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아야 길하다. 집안에 연못이나 우물을 두면 흉하다. 아울러 동사택과 서사택 한 방향으로 문과 주, 조가 배치되어야 한다.

김좌진 생가는 뒤로 낮은 산을 지고 있는 형국이라 양택삼요중 하나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본채가 앞쪽의 광보다 높아 전저후고의 이치를 잘 지키고 있다. 또한 들어서는 문은 문간방으로 막혀 좁으며 마당은 넓어 전착후관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본채의 서까래가 보이는 지점이 주(主)가 되므로 동사택이다. 문은 병오정에 들고 주는 갑묘을에 드니 이는 동사택이다. 특히 문이 아슬아슬하게 동사택 내에 들었는데 문이 남서방에 가깝고 대청에서의 향이 서쪽이니 해가 많이 드는 집이다. 동사택은 귀함이 먼저인지라 이름을 얻는 집이고 서사택은 부가 먼저 따르는 집이다.

생가의 뒤쪽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으나 마구 파헤쳐 배산의 모습이 흩어지고 있다. 개발이나 사적개발도 좋지만 가장 기본적인 풍수적 요소를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