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은 말 그대로 태를 묻은 봉우리라는 말이다. 태봉이라는 말은 누구의 묘에나 붙이는 것은 아니다. 태봉이라는 것은 바로 왕족의 흔적이다.
탯줄를 소중하게 여긴문화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다. 진천에 김유신의 태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역사도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전부터 탯줄을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며 왕족의 태봉은 이전에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현재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태봉이 대부분인데 간혹 고려시대의 태봉도 남아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태봉은 대부분 사라지고 전설이 되거나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태봉을 만드는 작업은 소중하고 격식있게 가꾸어졌다. 궁중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산후 3~7일 사이에 길한날을 잡아 태와 태의(태반, 아기집)을 깨끗이 씻은 다음 술로 갈무리 하여 태항아리에 넣었다. 태를 넣을 때는 먼저 작은 백자항아리의 바닥에 동전 한 닢을 글자 면이 밑으로 향하게 놓고, 그 위에 태를 놓은 다음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묶어서 밀봉하여, 이 항아리를 더 큰 항아리에 담고 흔들리지 않도록 빈 공간을 솜으로 채워 넣고, 뚜껑과의 틈새는 엿을 녹여서 밀봉하였다.
한쪽 면에는 년월일시 중궁전(또는빈) 아기씨 태아 라고 쓰고, 반대 면에는 의관이 서명한 붉은 패를 달았다. 이 항아리는 다시 넓직한 독에 넣어 빨간 끈으로 동여맨 후 길한 방향에 안치하였다. 이 태항아리는 여자는 3개월 남자는 5개월 이내에 태실을 선정하여 봉안하였다.
‘조선의 왕세자교육’ 이라는 책의 저자인 김문식의 연구에 따르면 태실을 만드는 과정은 차라리 눈물겹다. 마치 황자의 탄생과 왕의 승하에 버금가는 정성을 들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태봉을 만들기 위해 나라에서는 임시부서인 태실 도감을 설치하고 길지를 택하도록 태실 증고사(안태사)를 파견하며 이들은 전국각지를 시찰한 후에 적당한 자리의 지형을 그린 태실산도를 올린다. 보통 임금이 큰 반대 없이 허락을 하면 현을 군으로 승격시키고 일정한 법식의 안태의식을 치룬다.
태가 지나가는 주·현의 관문에서는 채색 누각을 짓고 의장과 음악을 갖추어 맞이하고 태를 모시는 곳에서는 채붕(綵棚, 무대장식)을 짓고 나희(儺戱, 광대놀음)를 베풀게 하여 백성들의 이목을 모은다.
태를 봉안한 이후에는 땅의 신에게 알리고, 태신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려 태가 유실되는 일이 없기를 빌고 태실 주위에는 표지석을 세워 주변의 나무를 베거나 석재를 채취하거나 개간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다.
태실을 꾸미는 정도는 세자, 대군, 왕자, 공주, 옹주 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훗날 왕이 되면 새로이 명당자리를 잡고 태실을 옮겨 돌난간과 비로 꾸민다. 그야말로 왕의 승하와 다름없는 거창한 일이다.
왕실은 안태의식을 통해 조선왕실을 홍보하고 서민들에게 나라의 존재감을 일깨워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리하여 왕릉이 경기지역에 국한된 것에 비해 태실은 전국각지에 흩어져있다. 실록을 보면 화려하여 공역이 많이 동원되고, 태실주변에서는 농사, 석재, 벌채등이 금지되어 백성의 생계에 불편을주는등 부작용도 심해 자주 도마위에 오르곤 하였다.
안태사가 백성의 집이나 전지의 집 근처를 태실자리로 지목하면 이를 피하려고 백성이 재산을 기울여서 뇌물을 쓰는 일이 계속되었고, 태실부지로 낙점이 되면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야하는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항변을 하였다는 것도 보고 되어있다. 또 석물들을 만든 다음 땅에 묻을려고 하다가 그 산맥이 다른 태실과 혈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 발견되면 다른 태실자리를 알아보기도 하였고, 세금과 공역이 또 들어가야 하니 백성은 이중고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어떤 백성들은 석난간들을 쓰러뜨리거나 석물들을 파괴하여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있는 자들이나 정부에서는 이런 제도를 없애기를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뜻이있는 군왕이 아닌이상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뿐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이 일부는 남았지만 대부분 한곳에 모아지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일제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특히 궁궐이라고 할 수 있는 창경궁으로도 모셔진다. 특히 성종대왕의 태실은 창경원으로 이전되어 한때는 창경원이라는 관광지가 되어 구경꾼꺼리가 되기도 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국 황실의 태봉을 이전하기에 이르는데 그들의 주장도 일견 일리가 있기는 하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인들이 태봉을 이전하며 유물을 훔쳐간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함당하다고 주장하는 바가 없지는 않다.
"태봉에 암장시(暗葬屍)가 뒤를 이어 발견됨에 따라 이왕직에서는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는 그 같은 일이 없게 하고자 신중히 협의한 결과 역대의 태봉 중에 가장 완전하며 가장 고귀하게 건설되었다는 광주(廣州)에 뫼신 성종의 태봉의 모든 설비를 그대로 옮겨다가 석물이고 건물이고 한결 같이 창덕궁 뒤 비원에다가 꾸며놓고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케 하는 중이라는데 새로이 건설되는 태봉은 성종태봉을 표본으로 경중히 뫼실 것이라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면, 그 무렵에 이왕직에서는 전국 각처에 흩어진 왕실 태항아리를 수습하여 서울로 옮겨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개 태실의 석물은 현지에 내버려둔 채 태항아리만을 수습해 오는지라 그 모습을 보전하기가 힘드니 상태가 가장 좋은 성종태실 하나만을 골라 석물 일체를 창경원 쪽으로 옮겨오기로 했다는 그런 얘기이다.
그 시절에 수습되어 온 왕실의 태항아리는 우선 시내 당주동 128번지의 이왕직봉상소(李王職奉常所)에 임시 봉안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모두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원래 명당만을 골라 모셨을 태실 자리를 포기하고 구태여 태항아리를 한곳에 모으려고 했던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망국의 왕실이 겪어야 할 업신여김의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두고 반드시 이왕직의 만행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저간의 사정도 있었던 듯이 보인다.
그 당시의 기록을 확인해 보자. 무엇보다도 이 일을 관장한 이왕직의 전사(典祀) 이원승과 유해종이 전국 각처의 태실을 순방한 것이 1928년 8월 무렵이었고 또한 그 때가 순종 임금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러니 태실 정리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던 시점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에 봉안했던 순종의 태실조차도 1928년 8월 18일에 봉출했다가 홍성군청을 거쳐 그 다음날 서울로 옮겨진 대목에서도 왕실의 위세가 전혀 작용하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디랄 것도 없이 태실의 관리 현황이 너무 엉망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돌아다녀 본즉 역대 국왕의 태실은 여러 곳이 이미 도굴을 당했고, 심지어 태실이 명당이라 하여 그 자리에다 민간인들이 시체를 암장한 곳도 수두룩한 지경이었다. 그러니 온전하게 태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태항아리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명분이 고스란히 먹혀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령 충남 예산의 현종(顯宗) 태실은 태항아리마저 온데 간데 없었고, 충남 홍성의 순종 태실에는 암매장한 시신 두 구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현재 서삼릉 태실 구역으로 옮겨진 역대 국왕의 태실 가운데 소화(昭和) 연호가 새겨진 탑지와 더불어 신규 제작된 외호(外壺)에 담겨져 태항아리가 모셔진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풀이된다.
결국에 대다수 역대 국왕과 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져 마치 공동묘지와도 같은 음산한 형태의 군락을 이루게 된 데는 그러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창경궁으로 옮겨진 성종의 태실은 말이 태실이었지, 그저 이왕가 박물관의 야외 진열품으로 전락한 처지로 남겨졌던 것이다.
상기 내용은 인터넷의 http://myhome.naver.com/ehtrue2/CKmake에서 많은 분량을 가져왔다.
이왕직에 의해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고 전하는 순종의 태봉은 충청남도 구항면 태봉리에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나들목을 나서 29번 도로를 타고 홍성읍 방향으로 향하다가 구랑면사무소가 있는 구항로타리에서 우회전하여 은하면으로 이어지는 8번 도로를 타고 간다. 구절암을 알리는 입구를 지나쳐 약 1.5킬로미터를 가면 길가에 정미소가 있다. 이곳에 좌측으로 작은 길이 있고 태봉리를 알리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태봉리라고 쓰여진 방향을 따라 약 1킬로미터를 가지못해 마을 회관이 나타나고 바로 그 너머에 태봉산이 보인다.
태봉산은 길가에 우뚝 솟아올라 한눈에 보아도 태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이라고 해 보아야 89.5미터에 불과하지만 길에서의 높이는 대략 30미터에 이르지 못하는 높이이다. 마치 봉우리 하나가 솟아오른 모습이다.
태봉의 많은 숫자가 돌혈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순종의 태실 역시 마찬가지다. 태봉에 올라보면 기맥이 이어지는 방향에 작은 저수지를 파 버렸다. 그러나 기맥이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태실로 사유에 지각이 있는 돌혈이다. 그러나 주위에 인작이 가해지고 담이 쳐져있다. 자세히 살펴볼 수는 있다. 주위에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매우 뛰어난 혈상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