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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절암의 마애불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10-10 조회수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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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구절암을 찾는 길은 산이 높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 구불구불 꺾이는 산길을 지나 산사를 찾는 마음이 바쁘지만, 이정표도 없고 길을 물어볼 사람조차 발견할 수 없다.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한 산사를 이렇게 찾기 힘든 것처럼 구도의 길 또한 그만큼 멀고 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구절암 가는 길은 전형적인 시골길이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도 만날 수 없는 인적 드문 시골길이다. 다행히 길은 외길이다. 그다지 멀지 않은 절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험난한데, 어느 정도 가면 가파른 경사길이 나오지만 절은 아직도 멀었다.

구절암이 보이게 되면 좌우에는 크고 작은 돌을 손닿은 대로 올려 마치 탑처럼 쌓아놓은 것과 만나게 된다. 이제 굽이굽이 복잡하고 험난한 길을 지나 드디어 구도의 길을 찾아가듯 힘들었던 구절암에 도착하게 된다.

홍성 시내에서 21번 국도의 넓은 길을 따라 광천 쪽으로 간다. 홍성남부우회도로를 따라 구황농공단지와 학계야영장을 지나고 구황농협창고에서 우회전하면 편도 1차선의 농로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조금 가면 대정초등학교가 나오고,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지석마을길로 따라가다가 1킬로 정도 가면 지석마을회관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1.3km 정도 꼬불꼬불한 농로를 지나간다.
유난히 많은 공동묘지를 지나면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그다지 멀지 않은 절간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험난하다.

보개산 (274 m)은 멀리서 보면 뒷동산 같은 느낌을 준다. 논 사이의 꾸불꾸불하면서 완만한 길을 지나 구절암 부근에 가면 가파른 길이 이어져 조금 긴장이 된다. 전체적으로 구절암에 이르는 길은 차량 1 대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어서 조심해야 한다. 구절암은 아마도 마애불이 있어서 최근에 그곳에 만들어진 조그만 암자인 듯하다.

200여평 남짓한 사역에는 법당 건물 1동과 산신각 건물 1동 및 요사채 1동이 있으며,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구절암은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근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2008년에는 국비를 지원받아 당우를 지을 것이라 한다. 당우가 지어지고 구색이 갖추어지면 아름다운 절이 될 것이다.

마애불은 구절암의 뒷편 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뒷동산은 큰 바위 무리들로 가득차 있어 한 눈에 보아도 마애불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바위들은 특이하게도 푸른색을 띠고 있다. 마애불은 맨 앞의 푸른 색을 띠고 있는 바위의 동향한 면에 선으로 그리듯이 새겨져 있다.

문화재자료 361호 홍성 구절암 마애불은 충남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산101-2 보개산 구절암 경내에 조성된 마애불로 고려시대(13-14세기)의 걸작이다. 마애여래좌상은 보개산 남쪽으로 솟아 오른 바위면의 동남쪽에 불상을 조각할 부분만을 다듬은 뒤에 선각으로 앙연좌의 대좌를 새기고 그 위에 좌상의 마애불을 새긴 것이다. 높이는 대략 320cm이고 얼굴높이는 130cm이며 신체부위는 190cm이며, 폭은 190cm로서 마애여래좌상으로는 큰 편에 속한다.구절암의 마애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마애불의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매우 크게 표현하였는데 선각으로 소담스럽게 처리한 육계와 소발은 간결하면서도 인자하게 표현하고자 한 부처의 상호와 잘 어울린다. 아울러 얕지만 돋을새김의 방법을 사용한 상호는 마애불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이기도 하다. 이마에는 뚜렷하고도 깊게 백호를 표현하였으며, 그 밑으로 인중 부분은 깊게 조각하고 끝으로 갈수록 얕게 표현한 반원횽의 눈썹이 아름답다. 눈은 코와 붙여 조각하였는데 좁고 길게 치켜뜬 모습이지만 초리를 살짝 내리고 있어 근엄함보다는 인자함을 보이고자 노력하였다. 코는 좁은 인중 아래로 밑부분을 매우 넓게 표현하여 뭉툭한 모습이지만 본 마애불의 표현 가운데 가장 돋을새김이 강한 곳이다. 살짝 다문 듯한 입은 적당한 두께의 입술과 얼굴의 비례에 잘 어울리면서 전체적인 상호의 모습과 함께 인자함을 더하고 있다. 귀는 백호의 위치애서 목부분까지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근엄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자함을 갖춘 부처님의 상호이다.

목에는 삼도가 매우 뚜렷하게 조각되었는데, 마애불의 위치에서 볼 때 왼쪽 부분을 좀더 깊게 표현하고 점차 오른쪽으로 갈수록 얕게 처리하였으며 삼도의 두께도 달리 표현하여 선각의 마애불이지만 선의 강약과 두께의 표현을 통하여 간결한 표현 속에서도 불상의 모습을 최대한 표현하고자 노력한 모습이 나타난다.

신체는 통견의 법의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의 속에 나타난 둥글게 처리된 작은 어깨와 볼륨없이 밋밋하게 처리된 가슴, 전체적으로 얼굴의 크기에 비하여 작게 표현된 체구는 전체적으로 거구의 당당한 모습을 잃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과 왼손을 들어 가슴에 모으고 있는데 부식된 바위면으로 인하여 왼손의 모습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인 가능한 수인의 모습을 알아보면 오른손은 손을 곧게 편 자세에서 손등을 밖으로 보인 다음 약지와 종지를 약간 구부린 듯 표현하였으며, 왼손은 엄지의 표현만을 살펴볼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오른손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처리되었다. 아마도 구품인 내지 전법륜인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하체는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였는데 무릎과 다리의 표현은 보이지 않고 위로 향한 발바닥만 양 옆으로 대칭되도록 표현하였다. 아울러 위로 향한 발바닥에는 정확하게 다섯 개씩 발가락의 표현을 잊지 않았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옷주름의 표현이 거의 없이 간결한 선 처리만으로 법의를 표현하였다. 가슴 앞에서 여민 법의는 어께에서 가슴선으로 내려어는 선은 1조의 선으로 구획하였고 오른쪽에서는 팔을 구분하기 위하여 1조의 선을 추가하였으며 왼팔에는 2중의 사각형을 표현하여 약간의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한편 법의는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까지 길게 덮은 것으로 처리되었는데 가운데 부분에서 2조의 U자형 옷주름이 나타난다.

대좌는 앙연좌로서 역시 선각이다. 현재 확인되는 연꽃잎은 5잎만이 보일 뿐이나 분명히 앙연좌임에 틀림없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크게 부각되어 비례는 어색하나 강약의 선처리, 중요한 부분의 돋을새김 등은 간결하게 처리하면서도 근엄함 속에 인자함을 함께 갖춘 부처님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조각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마애불 앞으로 조그만 바위그늘이 있는데 그곳에는 조성 당시의 것으로 직접 연결시키기는 어렵지만 상하 종서의 명문이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마애불은 미륵불로 조성된 것 같다.

이와같은 구절암 마애불은 선각의 마애여래좌상으로서 전체 높이 320cm의 거구로서 다음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좌상이라는 점, 선각에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중점적인 표현을 하고자 한 곳은 돋을새김을 한 점, 비록 선각에 의존하고 있지만 인간적으로 불안을 표현한 점, 좀고 둥근 어깨에 평판적인 신체, 단판의 연꽃잎으로 된 단순한 연화대좌, 전법륜인의 수인 등은 같은 홍성지역에 현존하는 마애불과 석불들의 일반적인 특징과는 다른 점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현존하는 홍성지역의 마애불과 석불의 경우 고려초의 작품인 홍북 상하리 미륵불과 광경사지 석불좌상을 제외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진 용봉사 마애불과 가마밭골사지 출토 석불, 신경리 마애불(고려), 용봉산 빈절골사지 마애불(조선), 결성산 고산사 석불, 홍북 용산리 석불, 홍북 내덕리석불(이상 고려), 대교리 석불(조선) 등은 한결같이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입상이며, 수인은 오른손을 내려서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들어서 시무외인을 결하고 있으며 마애불의 경우는 모두 두부는 깊게 새기고 신체부위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얕게 부조하는 돋을새김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오른손은 곧게 내려서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들어서 시무외인을 결하고 수인은 통일신라시대 이래 홍성지역만의 특징적인 수인으로서 현존하는 홍성지역의 마애불과 석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구절암 마애여래좌상은 선각의 조각기법과 좌상, 그리고 전법륜인의 수인(왼손의 마모가 심하여 불확실하지만) 등에서 홍성지역의 다른 불상들과 차이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구절암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연대는 사찰의 경내에서 발견된 강희명 조선시대 기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추론이 맞는다면 구절암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연대는 조선시대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의 무렵이 될 것이다.

마애불은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마모가 심한 탓에 다소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절리 때문인지 지진 때문인지, 현재 모습의 마애불은 다소 기울어져 있다. 바위 옆에 서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지진에 의해 바위가 약간 기울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둥근 얼굴에 뭉툭한 코, 웃고 있는 모습에서 원만함을 느낄 수 있다.

머리에는 구슬로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눈썹 사이에는 동그란 백호(白毫)가 뚜렷이 새겨졌고 손과 발은 명확히 표현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마애불들이 거의 서 있는 모습인데 비해 이 마애불만은 연꽃모양의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어 특이하다. 형태가 특이한 보기드문 작품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조각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다른 의견에 따르면 고려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예로부터 바위는 기맥의 증거로 여겨졌다. 따라서 바위가 많은 산은 음택의 조건인 혈을 결지하기 어렵지만 양택으로서의 가치는 사찰을 지어 기도처로 사용하는 것이다. 전국의 사찰중에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닌 경우가 많으니 각기 비보사찰이니, 기도사찰이니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바위가 많은 곳에 지어진 대부분의 사찰은 기도처로서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기맥이 강하기 때문이다.

구절암은 그다지 큰 터는 아니다. 그러나 부정확하지만 백제시대부터 있었다는 일설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애불의 연대 측정도 조금 더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터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은 2007년 10월 10일 현재 단청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바위가 깔려있어 그 기맥이 자못 심상하다. 산신각도 제법 기맥이 강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기도처로서는 어느곳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

교쇄가 매우 뛰어난 사찰이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구절암에서는 멀리 사해바다가 보일정도로 시야가 좋다. 사찰의 잇점을 대부분 지닌 곳이다. 사찰로서는 명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비록 터는 좁으나 매우 강한 기로 인해 불승의 덕이 있을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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