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읍에서 덕소로 이어지는 도로는 86번 도로다. 흔히 창현으로 불리는 지역을 벗어나 덕소를 향하여 달리다 보면 오래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낚시터를 만나게 된다. 바로 낚시터 부근의 큰길가에 이순지의 묘역이 있다. 묘역은 마석우리에서 차산리로 가는 길인 노루모재 우측, 즉 화도읍 차산리 산5번지에 있으며, 1984년 9월 12일 문화재자료 제54호로 지정되었다.
묘 아래 큰 길가에는 귀부를 갖춘 신도비가 있다. 규모는 높이 320㎝, 너비 76㎝, 두께 45㎝로 근래 새로 세워진 것 같다. 신도비가 이정표 역할을 해 준다. 낚시터도 제법 넓다.
이순지(1406∼1465)는 조선 초기 천문학자로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성보(誠甫)이며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묘역은 정부인 영월 신씨와 합장묘로 남향하고 있으며, 1465년(세조 11)에 조성되었다. 원형봉분에 활개를 갖추었으며, 봉분의 높이 2.3m, 동서직경 8.9m, 둘레 15m이다. 봉분 앞에 묘표와 상석이 각각 2기씩 세워져 있는데, 묘표는 월두형(44×24×117)으로 되어 있다.
비에는 “判中樞靖平李純之之墓 貞夫人寧越辛氏之墓”라 쓰여져 있고, 비의 형태가 보여주듯 고려시대 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묘표에서 약 5m 전방에는 명문이 없는 장방형의 기둥이 좌우에 세워져 있는데 상단에 약간 몰딩이 되어 있다.
이순지는 여러 가지 학문에 뛰어난 학인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천문학자는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순지의 묘역에서는 뛰어난 풍수사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이순지는 풍수에 뛰어난 학인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자고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육신을 맡겨야 하니 아무리 뛰어난 지식이 있어도 후사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이순지의 묘역은 혈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긁어모은 듯 보이는 묘역에는 혈상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앞으로 뻗어나긴 지맥의 모습이 설기한 것은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개의 혓바닥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최근 백호 앞으로 교회가 생겼다. 묘역에 서서 살펴보면 교회의 후미에 이순지의 묘를 직선으로 바라보는 지각이 보인다. 물론 육산이고 뭉툭한 지각이라고는 하지만 묘역을 직선으로 찌르고 바라보니 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부언하자면 묘역 앞의 낚시터도 안타깝기만 하다. 예로부터 물은 재산으로 해석하기에 묘역을 정하면 후손들이 저수지나 호수를 파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작은 호수나 저수지는 재산으로 해석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물의 색이 탁하면 후손에 내장계열의 병이나 안질 계열의 병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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