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아가기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 관산 주안점
이 집은 화길옹주가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1765∼1772,12세~19세)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 집은 북한강변(北漢江邊)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주변 산이 둘러싸며 국(局)이 좁고 주밀(周密)하다. 산자락 한줄기가 집의 뒤를 감싸돌고 다른 줄기가 집 앞 50m쯤 거리에 조그만 동산을 만들었는데 이 동산이 바로 안산(案山)이며 여기에 집주인 옹주의 묘(墓)가 조성되어서 항상 사랑누마루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일대가 도시로 개발되어 아파트촌이 되면서 공주의 묘는 어쩔수 없이 이장되었다. 2007년 11월 현재, 궁집은 남아 있지만 공주의 묘는 없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기자(己字) 모양인데 꼬리가 거꾸로 돌아 앉았으며 건물이 한덩어리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문간채는 일찍이 헐린 듯 하며 담장이 공간의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안채는 안방과 대청을 일자(一字)로 두는 남도방식(南道方式)으로서 사대부(士大夫)집에서 가끔 쓰이는 ㅁ자집이다. 서북쪽에는 부엌, 안방, 대청을 일자로 배치하고 꺽어져서 양쪽 측면으로 동쪽에는 건넌방과 부엌, 서쪽은 아랫방과 사랑뒷마루가 놓였다. 안마당 전면은 동쪽에서부터 대문간과 광, 책방의 차례이고 귀퉁이에 연결하여 커다란 사랑방이 시설된다.
사랑방 서쪽은 사랑대청이며 서쪽 끝에는 높다란 누마루가 사랑툇마루 앞으로 쑥 내밀었다. 구조는 안방과 사랑부분을 모두 1고주5량으로 하여 보간을 2간 너비로 처리했고 기타 안채 날개와 중문간을 맞걸이3량으로 하였다. 사랑채의 모든 샛문과 전면문, 안대청의 샛문과 전면문이 모두 분합문(分閤門)으로 되었으며 특히 사랑채는 툇마루 앞에도 분합문을 달아서 공간을 구분짓고 있다.
이 집은 산기슭에 위치하기 때문에 배산임수의 전형을 이루었으나 지나치게 좁은 것이 흠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 문간채가 있었음직한 자리에는 소나무 2그루가 있으며 사랑방 앞에도 정원수들이 심어졌다. 뒤뜰에는 감나무와 앵두, 오동나무, 철쭉, 회양목, 호두나무 등이 자라며 뒷산은 밤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원축조물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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