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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세겸과 어효첨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11-15 조회수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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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함종어씨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가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함안과 밀양에서 만날 수 있는 어변갑의 명성은 다르다. 또한 좌의정을 지낸 어시겸이나 그의 부친인 이효첨의 명성도 높다. 특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서 충절로서 죽음을 맞이한 어제연은 길이 이름을 빛내고 있다.

여주 점동면에서 84번 도로를 타고 역 5킬로를 가니 머리위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1킬로미터를 가니 우측에 금당초교가 나오고 그 옆에 함종어씨세장지를 알리는 작은 표석이 있다. 표석을 따라 올라가니 정면에 문정사가 나타난다. 정면에는 어세겸과 어효첨의 신도비가 반긴다.

우측에는 세장지를 관리하는 후손이 살고 계시다. 어세겸의 18대 자손이라 하신다. 후손의 도움으로 세장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시간도 늦었으므로 모두 둘러볼 수 없었다. 따라서 어세겸과 어효첨의 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도로를 따라 올라 막다른 곳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상부의 좌측 능선 최상부에 어세겸의 묘역이 있고 그 우측의 작은 지각에 어효첨의 묘역이 있다.

함종어씨에 대해서는 종중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咸從魚氏의 始祖(시조) 戶長同正公(호장동정공) 諱(휘) 化仁(화인)은 중국 풍익(지금의 섬서성)에서 南宋때(고려 明宗 元年) 난을 피하여 처음 江陵(강릉)땅에 왔다가 뒤에 평안남도 咸從으로 옮겨서 6世 檢校軍器監事公(검교군기감사공) 휘 石公(석공)까지 高麗朝(고려조)에 벼슬하여 顯族(현족)으로 세거하였기에 우리 魚氏는 함종을 本貫(본관)으로 삼게 된 것이다.

朝鮮朝때 선의왕후魚氏(有龜의 따님)가 20대 景宗大王(경종대왕)의 王妃(왕비)가 되면서 咸從縣(함종현)이 咸從府(함종부)로 승격되었다.大韓帝國(대한제국)에 와서 평안남도 江西郡 咸從面이 되었다.

함종어씨의 派名錄(파명록)을 보면 文貞公派(문정공파), 襄肅公派(양숙공파), 縣監公派(현감공파), 訓導公派(훈도공파), 護軍公派(호군공파), 浪仙公派(낭선공파), 司直公派(사직공파), 漢宗公派(한종공파), 漢緯公派(한위공파), 漢亨公派(한형공파), 副正公派(부정공파)로 11계파가 성세를 이루었다.

2000년도 정부의 인구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280姓氏 中 魚氏가 인구 순위 95위(17,551명)로 3개 魚氏(咸從, 忠州, 慶興)중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서울과 경기, 강원, 경남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先祖(선조)의 주요 世居地(세거지) 변천을 보면, 始祖(시조) 戶長同正公(호장동정공)이 처음 강릉 땅에 왔으며, 뒤에 함종에 살다가 7世 中郞將公(중랑장공)이 영남 晋州(진주)로 옮기어 8世 署令公(서령공) 휘 得龍(득룡), 9世 左尹公(좌윤공) 휘 伯游(백유), 10世 휘 淵(연), 11世 直提學公(직제학공) 휘 變甲(변갑)까지의 산소를 경남 固城(고성)과 咸安(함안)등지에 모시게 되었다. 한편 강릉에는 3世 檢校衛將軍公(검교위장군공)이 세거하면서 현재까지 江原道 일원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10世 縣令公(현령공) 휘 淵(연)의 다섯아들 중 큰아들 直提學公(직제학공) 휘 變甲(변갑)이 大科에 장원하여 出仕(출사)한 후 대물려 높은 벼슬에 올라 12世 文孝公(문효공)이래 그 후계가, 서울에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령공의 막내아들 휘 變文(변문)의 후계자가 경남 金海(김해)에 자리 잡았다.

13世 문정공 휘 世謙(세겸)의 자손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현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자리 잡았다. 문정공의 동생 襄肅公(양숙공) 휘 世恭(세공)의 5형제 중 큰아들 14世 府使公(부사공 : 孟淳)의 자손들은 경기도 고양 용인 양주 등지에 護軍公(호군공 : 孟渾) 校尉公(교위공 ; 孟湛) 司果公(사과공 : 孟淙)의 후손들은 경남 고성과 충북 충주에 자리 잡았다. 魚氏는 咸從, 忠州, 慶興, 의 三本이 전하고 있으나 어씨는 대부분이 함종어씨로 알려져 있고, 조선조에서 대대로 벼슬하기는 주로 함종어씨였다.

오늘날 인구는 비록 적지만 역사적으로 國婚(국혼)도 하고 정승과 名臣(명신)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조선조에 30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고, 그중에 정승 1명(연산조 좌의정 휘 世謙), 湖堂(호당) 2명(좌의정 世謙, 집의 泳濬), 淸白吏(청백리) 1명(집의 泳濬), 文衡(문형) 1명(좌의정 世謙), 經筵官(경연관) 1명(찬성 有鳳), 功臣(공신) 2명(함종부원군 정난3등 世謙, 아성군 적개2등 世恭), 將臣(장신) 1명(함원부원군 호위대장 有龜), 節臣(절신) 2명(좌의정 世謙, 판돈녕부사 有龍)등을 배출하여, 어느 대성에 못지않은 名門이라 할 수 있다.

함종어씨 중흥의 祖는 綿谷公(면곡공) 휘 變甲(변갑)이다, 世宗때 명신으로 太宗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集賢殿直提學(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咸安(함안)에 돌아가 老母를 봉양했다.

면곡의 아들 文孝公(문효공 : 孝瞻)은 조선초기의 大儒(대유)로서 명성이 높았다, 24살(1429)에 문과급제하여 집현전교리가 되어 젊은 학자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대 왕조에서 大司成(대사성)과 大司憲(대사헌) 吏曹判書(이조판서)에 승진, 이어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에 이르러 치사하고, 奉朝賀(봉조하)가 되었다. 議政府 領議政 咸從府院君(의정부 영의정 함종부원군)에 추증되고 시호가 文孝이다.

문효공의 두 아들이 바로 文貞公(문정공 : 世謙)과 襄肅公(양숙공 : 世恭)이다. 문정공은 세조2년(1456)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예종대왕이 즉위하자,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咸從君에 봉해졌다. 平安道 觀察使(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成宗大王이 즉위하자 大司憲(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奏問使(주문사)가 되어 3, 4차나 明나라를 왕복하면서 建州征伐(건주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등 外交的 성공을 거두고, 공조, 형조, 호조, 병조판서를 거쳐 右議政(우의정)이 되어 兩館大提學(양관대제학)과 咸從府院君(하종부원군)으로 가자되고 左議政(좌의정)이 되었다. 机杖(궤장)을 하사받았고,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文貞이다.

문정공의 아우 襄肅公(양숙공 : 世恭)은 형과 나란히 문과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左承旨(좌승지)를 역임하였고, 1467년 李施愛亂(이시애란)이 일어나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敵愾功臣(적개공신) 2등으로 牙城君(아성군)에 봉해지고, 1468년 謝恩副使(사은부사)로 明나라에 다녀와서 경기관찰사와 漢城判尹(한성판윤)을 역임 후 호조판서로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을 겸하고 이어 병조, 공조, 형조판서 등을 지낸 후 左參贊(좌참찬)이 되었다, 시호는 襄肅(양숙)이다.

학술과 시문에 능한 灌圃公(관포공) 휘 得江(득강)은 14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校理(교리) 大司諫(대사간)을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上護軍(상호군)을 사직한 후 여러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고, 오로지 학술과 시문에 전심하였으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경남 고성의 葛川書院(갈천서원)과 雲谷書院(운곡서원)에 배향되었다.

淸白吏(청백리)로 녹선된 松亭公(송정공) 휘 泳濬(영준)은 1507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弘文館(홍문관) 修撰(수찬) 司諫院 正言(사간원 정언) 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 등을 지내고, 湖堂(호당)에 올랐으며 효행이 卓世(탁세)하여 命旌(명정)이 되었다.

也足堂公(야족당공) 휘 叔權(숙권)은 한때 栗谷(율곡) 李珥(이이)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博學能文(박학능문)하여 詩評(시평) 詩論(시론)이 뛰어난 학자로서 史文과 中國語에 능하여 1525년 吏文學官이 되었다, 禦侮將軍(어모장군) 副護軍(부호군)과 錄光國原從功臣(녹관국원종공신)이며 편서로 稗官雜記(패관잡기)와 故事撮要(고사촬요)가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府使公(부사공) 휘 泳潭(영담)은 지략이 뛰어나 呂島萬戶(여도만호)에 발탁되고, 무과에 급제한 후는 여러 鎭官(진관)의 막하로 있으면서 海路(해로)를 익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光陽縣監(광양현감)으로 충무공이순신 휘하에서 주로 향도로 활약 玉浦(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1597년 정묘재란 때 노량해전에서의 전공으로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승진, 다음해 助防將(조방장)이 되어 어선포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양숙공의 증손인 牙善君(선군) 휘 季瑄(계선)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都承旨(도승지)를 역임하고, 1560년에 형조참판이 되어 牙善君에 봉해지고, 연경성절부사로 明나라에 다녀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漢城判尹(한성판윤)과 工曹判書(공조판서)와 議政府左參贊(의정부좌참찬)에 이르고 耆老所(기로소)에 들었다.

함종어씨가 낳은 대표적인 학자 杞園公(기원공) 휘 有鳳(유봉)은 양숙공의 9대손이다, 農巖(농암) 金昌協(김창협)의 門人(문인)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巨儒(거유)이다, 호조참의와 經筵官(경연관) 世子侍講院(세자시강원) 贊善(찬선)을 지냈다, 그의 문하에서 李天輔(이천보) 洪象漢(홍상한) 尹得觀(윤득관) 등 학자가 배출되었다.

기원공의 아우 御營大將(어영대장) 휘 有龜(유구)가 곧 제20대 景宗大王(경종대왕)의 國舅(국구 : 장인)이다. 그는 御營(어영)과 扈衛大將(호위대장)을 지내면서 老論(노론)들이 화를 입게 되자 노론을 적극 옹호했다. 咸原府院君(함원부원군)에 봉해지고, 大匡輔國(대광보국) 崇祿大夫(숭록대부) 議政府 領議政(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시호가 翼獻(익헌)이다.

그의 6촌 아우인 靖憲公(정헌공) 휘 有龍(유룡)은 노론의 맹장으로 辛壬士禍(신임사화) 때 귀양을 갔었고, 뒤에 英祖가 즉위하면서 풀려나와 大司諫(대사간)에 이르고 1744년 사은부사로 淸나라에 다녀왔고, 황해, 강원감사와 지중추부사, 한성판윤과 보국숭록대부 判敦寧府使(판돈녕부사)를 역임,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다, 향년 87세, 시호가 靖憲(정헌)이다.

근세에 와서 武臣(무신)으로 鎭撫中軍(진무중군) 휘 在淵(재연)은 양숙공의 12대손으로 충청도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를 거쳐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함대가 江華(강화)에 침입해 오자 右先峰(우선봉)으로 廣城鎭(광성진)을 수비했고, 辛未洋擾(신미양요)1871년 때는 진무중군으로 다시 광성진을 수비하다가, 미국군과 치열한 전투 중 그의 아우 吏議公(이의공) 휘 在淳(재순)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兵曹判書(병조판서) 兼知三軍府事(겸지삼군부사)에 추증되고, 시호가 忠壯(충장)이다.

구한말의 개화대신인 度支部大臣(탁지부대신) 휘 允中(윤중)은 1881년 신사유림단을 이끌고 日本의 문물을 시찰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淸國과의 외교활동을 했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떴고 진보적 경제이념을 체계화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란, 아관파천까지 격랑의 한 시대를 살며 점진적으로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제1차 金弘集(김홍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에 임명된 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치고 그의 경제론을 우리나라 근대경제학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서북경략사로 파견되어 淸 ㆍ露(청ㆍ노)와의 국경을 정하는데 노력하여 間島(간도) 영유권의 최초확인자로서 간도는 명백히 조선 땅이라고 보고했으나, 뒷날 日帝에 의해 간도영유권은 멋대로 淸에 넘겨졌다. 奎章閣 大提學(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고 시호는 忠肅(충숙)이다.

魚門의 이채를 띄운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로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魚允姬(어윤희)여사를 들 수 있다.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3˙1운동1주년을 기념하고자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제히 옥중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53년 나이팅게일기장,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

允迪(윤적)은 韓末(한말)의 문신, 학자, 1904년 외무부참사관을 지내다가, 총영사관이 되고 이어 龍川府尹(용천부윤)이 되었다. 1907년 학부 편집국장이 된 후 국문연구소 개설의 주동적 역할을 하여 국문통일에 노력하였다. 그 후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장과, 관립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묘역의 최상부에 어세겸의 묘역이 있다.서울 고덕에서 이장해 온 묘다. 그러나 이장 당시에 유골은 없었다고 한다. 대략 1982년경에 이장하였다고 한다.

어세겸(魚世謙 1430∼1500(세종 12∼연산군 6))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이 되고,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정자에 보직되고 봉상시녹사를 거쳐 1459년 천추사(千秋使) 이극배(李克培)의 종사관인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66년 김국광(金國光) 등이 천거하여 종부시정으로 예문관직제학을 겸하였다. 1469년(예종 1) 강순(康純)·남이(南怡)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성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에 오르고, 1479년(성종 10) 말 건주위(建州衛) 정벌 승전에 관한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외교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돌아오면서 《오륜서(五倫書)》 《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서책을 들여왔다.

1495년(연산군 1)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사초문제(史草問題)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한편 성종 말에 권근(權近), 윤회(尹淮), 변계량(卞季良), 최항(崔恒)의 뒤를 이어 문형(文衡)을 담당하였으며, 1483년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과 함께《연주시격(聯珠詩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언해하였다.

1490년(성종 21)에는 왕명으로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 등을 개찬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 《주례(周禮)》를 개주(改註)하여 임금에게 올렸고, 1492년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진법(陣法)》을 편찬하였다. 저서에 《서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물론 어세겸이 풍수지리를 배척하고 불교도 배척한 대표적인 학사이기는 하지만 그의 묘역을 보면 풍수지리를 배척한 뚜렷한 흔적이 있다. 그의 묘역이 비록 이장된 묘역이라 하나. 풍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함종어씨 묘역이 있는 산은 전체적으로 노년기 산으로 흩어지고 이리저리 기맥이 흘러나간 산이다. 이러한 산에서는 혈이 맺히는 경우가 드믈고 혈이 응결된다고 해도 그 힘이 미약하다. 더구나 깊게 판 모양으로 보아 경사가 심한 산등을 파고 묘역을 조성하였는데 유골이 없으니 동기감응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할 가치가 없다.

어변갑 묘 좌위측, 즉 백호자락이 시작되는 곳에는 그의 부친인 어효첨의 묘역이 있다. 함종어씨 묘역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묘역이다. 그 부근으로 후손들의 묘역이 기맥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어효첨(魚孝瞻)1405(태종 5)∼1475(성종 6)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어세겸의 부친으로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는 만종(萬從), 호는 구천(龜川)이다. 집현전직제학 변갑(變甲)의 아들, 직제학 성사제(成思齊)의 외손, 좌의정 박은의 사위이다.

1423년(세종 5)생원시에 합격하고, 1429년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선임되고, 이어 대교가 되어 기사관으로서 《태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동궁일 때 선발되어 좌정자, 좌우사경문학(左右司經文學)을 거쳐 1443년 집현전교리가 되어 서연관으로 문명을 날렸다.

1446년 집현전응교, 1449년 직집현전(直集賢殿)을 역임하고, 예법·공법(貢法)·사창법(社倉法)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고려사》의 체재를 기(紀)·전(傳)·표(表)·지(志)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1449년 사헌부집의가 되어 불교와 음사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부중(府中)에 있는 음사를 훼철하였다. 1453년(단종 1)판내자시사에 오르고, 전라도를 안찰하여 폐정을 바로잡았으며, 이듬해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 당시 당대의 실권자인 수양대군이 주장하는 납비(納妃)문제를 극력반대하고, 1455년 세조가 왕권강화를 꾀하기 위하여 의정부의의제(議政府擬議制)를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변경할 때 하위지(河緯地)·이예장(李禮長) 등과 함께 극력반대하는 등 세조의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승진, 의금부제조를 겸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을 다스리면서 점차 중용되었다.

그 뒤 호조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458년(세조 4)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중추원부사·한성부윤·형조참판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고 1463년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가을 지중추원사로 옮기고, 1467년 영중추부사, 1468년(예종 즉위년)동지중추부사, 1474년(성종 5)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아버지와 장인으로부터의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문명을 드날리고, 성리학 특히 예학(禮學)에 깊어 세종 말년에는 집현전교리로서 서연관을 겸할 때 세자에게 《예기》를 강하기 위하여 《예기》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중요 학설을 발췌하여 주석을 단 《예기일초 禮記日抄》를 지었다.

또한, 예법을 존중하여 풍수지리설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세종조 후반에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와 《고려사》의 편수에도 참여하였다. 큰아들 세겸(世謙)은 좌의정을, 둘째아들 세공(世恭)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어효첨의 묘역 또한 어세겸의 묘역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근본적으로 기맥이 약하고 이리저리 흩어졌으니 병룡은 아니라 해도 약룡에 가깝다. 아무리 기맥이 있고 능선을 따라 혈상을 찾는다 해도 이러한 산의 경우에는 혈장을 찾기 어렵다. 특히 어효첨의 묘역은 좌우로 지각이 있어 작은 곳이라 해도 계곡풍을 받는 곳이 아닌가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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