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 설성면 설성로타리를 지나면 이천시 장호원읍에 속하는 지역이 나온다. 설성 로타리에서 약 6킬로미터 정도를 가면 우측에 어석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간판이 나타난다.
석불입상은 마을 입구에서 세 번째 집 옆에 있다. 행정구역상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565-1번지이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 석불은 상·하 2매의 커다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에 돌갓을 쓰고 있고 네모진 몸통 위에는 네모진 머리를 올려놓아 마치 4각의 돌기둥과 같다.
민머리의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돌갓이 올려져 있다. 이마는 네모이지만 뺨과 턱에서는 비교적 둥근 맛이 난다. 큼직한 눈썹, 짧은 코, 작은 입, 길다란 귀 등의 표현은 부처님의 친근한 모습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얼굴 표현은 괴산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비슷한데, 고려시대 때 충청·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지방화한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머리에 돌갓을 쓰고 있는 이 입불상(立佛像)은 네모진 몸통 위에 네모진 머리를 올려놓은 기둥모양의 돌부처상이다. 이마는 네모이지만 뺨과 턱은 비교적 둥근 맛이 나는 점이나 큼직한 눈썹, 작은 입과 짧은 코, 턱도 없이 크고 기다란 귀의 표현은 충청북도(忠淸北道)의 미륵당(彌勒堂) 석불입상(石佛立像) 등 경기(京畿)·충청지방(忠淸地方)에서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유행하던 지방화한 불상의 특색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미륵불은 어석(於石)2리 마을 가운데 있으며 이 石佛에서 연유되어 옛부터 이 곳을 일러[미륵댕이]라 불리워 오고 있다. 미륵불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경기도에는 미륵뎅이라 불리는 곳이 적지 않다. 미륵뎅이. 미륵당은 미륵이 모셔진 곳이고 대게의 경우 당집이나 당나무가 같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이곳에는 당나무가 없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안성 매산리의 미륵이 그러하듯 이 불상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주변에 4개의 주춧돌이 남아있는데 보호각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보호각 안에 안치했던 탓으로 매우 깨끗하고 원형이 남았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네 개의 4角形 석주(石柱)가 불상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이천시(利川市)자료에 의하면 약 1400여년 전 신라23대 법흥왕(法興王) 15년 주지 이모씨가 나라의 명을 받고 5개월이나 걸려 석공한 미륵이라고 유래를 밝히고 있으나, 법흥왕시대에는 이 땅이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신빙성이 희박하며, 도식화 표현양식)을 보더라도 삼국 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의 불교조각은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屈岩)이 완성되는 8세기중엽을 그 정점으로 하여 시대가 지날수록 차츰 쇠퇴현상을 보이는데, 이 어석리석불 입상은 형태와 규격화된 표현 수법에 있어 보물96호로 지정된 괴산미륵리석불입상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아 조성시대를 이와 비슷한 고려 초기로 추정할 수 있다.
미륵불은 용화사상의 산물이다. 미륵불은 내세를 비는 인간의 희구가 깃들여져 있다. 그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전쟁이 있었던 지역이거나 용화사상이 번져나간 곳이고 미륵불은 미래를 향한 욕구와 열망으로 불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특히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은 유선형의 산세로 미루어 금형과 아미형의 절충이 이루어진 가운데 유독 문필봉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어 신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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