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391번지(☎031-691-8559/641-0156)에 있다. 설성산의 정상부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음죽현(陰竹縣)에 속해 있었으며, 설성산은 음죽현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음죽현의 주산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선읍리 내부의 마을을 음죽읍내라 부른다. 이곳을 감싸고 있는 주산인 설성산은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웠으며, 정상부에는 설성이라고 불리는 산성이 있다. 성이 잘 보이지 않지만 신흥사는 설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산 뒤편에는 연화정사가 있다.
설성은 설성산 정상부와 그 북쪽에 위치한 봉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계곡을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신흥사에 올랐다면 등산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설성산은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산이 높고 험준하며, 주변은 넓은 평야가 있어 정상부에서는 북쪽으로 이천시내는 물론 설봉산성과 여주지역까지, 남쪽으로는 음성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설성산의 성벽은 둘레 1,095m, 남북 길이 345m, 동서 길이 320m로 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전체가 내외 양쪽에서 돌을 쌓아올린 협축법으로 쌓았으며, 자연 암반이 있는 곳에서는 암반 윗부분을 다음을 다음 성돌을 쌓아올렸다. 성벽의 높이는 약 4~5m이며, 구조적으로 취약한 부분에서는 성벽 바깥쪽으로 성벽 기단부를 보강하기 위한 보축을 하였다. 문터는 동문과 서문터가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평탄한 곳이 여러 곳 있으며, 그곳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산성은 백제 때 처음 쌓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축성 방법이나 출토 유물을 고려할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하면서 쌓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설성산의 옛 성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신흥사는 이리저리 비틀린 길을 타고 올라야 한다. 애초에는 신흥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연대를 알 수 없는 삼국시대 때 설성을 쌓을 때 설성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이를 확인할 수 없다. 문헌상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영조 36년(1760)에 편찬된《여지도서》의 서술이 가장 최초의 것이다. 책에는 설성을 언급하면서 `지금 작은 암자를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신흥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여지도서》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신경준(1712∼1718)의《가람고》에도 있다. 그러나 신흥사에 전하고 있는 전설에 의하면 고대 국가의 형성기라 할 내물왕때(356∼401), 설성을 축조한 장군을 위하여 절을 창건하여 설성사라 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범종각으로 오르는 도중 왼편의 별도로 만든 구역에 석조지장보살입상이 있다. 1998년에 조성한 보살상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가구식으로 조성한 기단을 두어 연화대좌 위에 세운 지장보살입상을 받치도록 하였다. 가구식 기단은 지대석과 우주, 탱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과 후면을 세 간, 양 측면을 두 간으로 나누고 모두 10분의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지장보살입상은 앙련과 복련을 새긴 연화대좌 위에 서있다. 통견의 법의를 입고 몸에는 영락을 늘어뜨렸으며 왼손에는 석장을 들고 있고, 오른 손은 배 앞으로 들어올려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보살상 앞에는 석등 2개가 서있다. 정면에는 범종각이 세워져 있다. 마치 문을 연상하게 한다.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 범종각이 있다. 종도리에 묵서로 상량문을 적어놓았는데, 불기2002년에 신축한 범종각으로 1×1간, 다포식 사모지붕을 한 건물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한 외벌대로 나지막이 만들었고, 원형초석을 놓은 위에 원주를 세웠다. 공포는 내외3포의 다포식으로 주간에는 하나씩의 주간포를 두었다. 지붕은 겹처마 모임지붕이며, 단청을 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특히 내부의 빗천장에는 연꽃과 연봉, 연잎을 가득히 그려 놓았다. 내부에는 사물 중 범종과 목어, 운판을 걸었다. 정면에는 ‘梵鐘閣’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범종각 뒤편 마당의 뒤쪽으로 약수가 있고 그 약수 위에 알루미늄샤시를 이용한 보호각을 지은 속에 매우 작은 규모의 관음보살좌상을 모셔놓고 있다. 너무 작아서 지나칠 수도 있는 보살좌상이다.
범종각을 지나면 주불전인 극락보전을 만난다. 신흥사의 주불전인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지장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1992년에 새로 지었으며, 신흥사의 가운데 단을 이루고 있는 대지에 동남향을 하고 있다. 3×2간으로 외5내7포의 다포식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 전체는 내외에 단청을 하였으며, 정면 기둥에는 보통 대웅전에 거는 주련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다음과 내용의 주련을 걸었다.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께서 온 세상에 두루 계시니 三世如來一體同(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여래가 모두 같은 한 몸이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크나큰 원력은 구름같이 항상 끝이 없어라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넓디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끝이 없어라
극락보전 옆 뒤쪽으로 약간 올라간 곳에 석불입상이 있다. 1983년에 절 아래 마을 앞 시냇가에 묻혀있던 것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佛身만 남아있던 것을 머리를 새로 조성하여 보수한 불상으로 역시 새로 조성한 연화대좌 위에 모셨다. 오른손은 가슴으로 올리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쭉 내렸으며, 법의는 통견이다. 옷주름의 모습이 좌우대칭으로 경직되어 있고 손을 비롯한 신체의 표현 역시 매우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극락보전 옆에는 연화대좌 위에 모셔놓은 작은 규모의 석불좌상이 있다. 불신(佛身)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머리 부분을 새로 조성하여 올려놓았다. 목에는 영락 같은 것이 조각되어 있어 보살상일 가능성도 있으나 무릎위에 올려 아래로 향하도록 한 오른손이 항마촉지인으로 보여 석가여래좌상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법의는 통견으로 다리 전체를 감싸고 바닥까지 흘려 내린 모습이다.
가장 기가 강한곳에 부도밭이 있다. 주차장에서 동쪽 산을 돌아간 곳에 산비탈을 약간 깎아 조성한 좁은 대지에 부도밭이 있으며, 이곳에 부도와 탑비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석조물이 있다.
여러기의 부도가 있는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보사민무순사리탑비’가 있다. 그 옆에는 신라계 석탑의 모습을 한 삼층석탑이 있다. 탑비는 1994년에 조성한 것으로 후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다.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는 것 같았는데 벌 수 없었다.
“인과응보 서기 1908년 춘천에서 출생 서기 1932년 신흥사에 불연을 맺고 주지 정해송 스님에 반려의 역을 하며 부처님께 귀의 일념으로 육십여년간 불사에 정진하시다 계유년 윤三월 초六일 입적 하셨네 다비후 사리 四과로 보여주시니 사부대중은 탑을 봉안하노라 불기二五三八年 十一월 十八일”
이 옆에는 다시 ‘圓寂祖上父母靈駕之塔碑’와 함께 부도 하나가 서있다. 이곳에서 다시 산을 돌아가면서 호랑이를 탄 산신상이 모셔져 있고, 다시 이곳을 지나면 부도와 보살상들이 나온다. 부도는 2기로 하나는 ‘禪師海松之浮屠’라는 명문이 적혀 있으며, 다른 하나는 ‘驪興閔氏戊順之浮屠’로 앞서 본 탑비의 탑이다. 이 옆으로는 석조 지장보살입상 두 분이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이 새로이 조성한 건물이라면 천불전과 산령각은 예로부터 자리하였던 건물이다. 극락보전 뒤쪽, 산 위쪽으로 올라가 한 단 높게 조성된 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극락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신흥사의 주불전이었으며, 천불전이 있는 영역이 주영역이었다. 1918년에 중건한 불전으로 3×1.5간의 작은 규모이며, 굴도리집, 맞배지붕이다.
마치 허리처럼 돌아간 산능선을 따라 앞쪽으로 가면 과거 산소로 쓰였을 것 같은 위치에 오래된 불상이 모셔져 있다. 판석에 새겨진 불상의 형태는 불완전하나 시선을 잡는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등에 새겨진 글씨는 후인이 새긴 듯하다.
이 판석의 불상 옆, 부도밭 위에 해당하는 지점은 풍수적으로 음택지로서도 좋은 명당의 입지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기도처나 불가에서 필요한 당우를 짓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여진다.
신흥사는 산의 정상에서 가까운, 어찌보면 9부 능선쯤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계곡을 따라 올라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계곡풍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나무를 심는 비보가 있을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계곡은 끝자락에 올라 방향을 바꾸었으며 좌측의 부도밭 자락이 뻗어 나름대로 교쇄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은 일견 계곡의 막바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틀어 자리하고 있으며 원래의 자리였던 천불전의 위치는 산능선을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와우형으로 판단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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