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동마을에는 성씨고가가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명은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리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는 석동마을이라 적혀있어 더 어울리고 나름의 정감이 있다.
이 집의 위치는 창녕에서 우포늪으로 통하는 지방도 1080호 선의 도로변에 있으며 우포늪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창녕군사무소가 있는 마을에서 대지로타리를 지나 대합면과 이방면으로 이어지는 1080번 도로를 이용한다. 농업기술원양파시험장을 지나 고속도로 밑을 지나면 곧 대지면이다. 대지면 옆으로 지나다 보면 길 옆에 비각이 보인다. 비각은 고려충신성사제신도비다. 문화재자료 24호로 지정된 고려충신성사제신도비(高麗忠臣成思齊神道碑)는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729-5번지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데 석동마을과 멀지 않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말의 충신인 성사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낮은 담장이 둘러진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성사제는 공양왕 때 보문각 직제학의 벼슬을 지내었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한탄하며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원래 두문동은 경기도 광덕산 서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지역이나, 고려말 72명의 신하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거부하고 숨어지내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후손들이 그의 충절에 보답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2003년 9월 1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 고려충신 성씨비에서 고려충신 성사제 신도비로 명칭변경되었다.
성사제 신도비를 지나 조금만 가면 석동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면 ‘성씨 고가’가 있다. 십수채로 이어진 이 마을은 하나의 가문이다.
이 가옥은 1929년경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인데, 전통 한옥양식에다 현대식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가미하여 생활 하기에 편리하도록 지어졌다. 울타리안이 1만여평의 넓은 부지에 충분한 정원을 갖추고 있는 집으로 2004년 경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 되기 전에는 성부자집으로 불리어 졌던 집이다.
이 지방에서 만석꾼 집으로 통하는 성부자집은 창녕을 관향으로하며 근처에는 창녕성씨 시조묘소를 비롯해서 관련 유적지도 산재해 있다. 한국에 처음으로 양파씨를 가져와 재배를 시작한 이도 이 집의 주인인 성재경씨다. 한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인 성혜림(김정남의생모)의 친정집이기도 한데,성혜림이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이 집에서 성장했었다.
현재 성씨 고가는 현재 큰집, 둘째, 셋째, 넷째의 집으로 이뤄진 1만평 남짓하다. 그 중 셋째의 집은 썩은 목재를 교체하는 등 1999년 복원되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었는데 전통양식에 약간의 변형이 가미된 특이한 집이다.
주차장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양파가 재배되었음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이곳은 전국 최초 양파 시배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특산물인 양파, 마늘의 주산지로 이름이 난 지역이다. 부근에는 창녕성씨의 시조묘와 신도비가 있으며, 대종재당 맥산제와 물계서원 고려충신 성씨비등 우수한 문화재가 있다. 또한 1억4천만년전에 형성된 자연 생태계의 보고인 우포늪과 창녕의 명산인 화왕산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곳에 성씨문중의 입향조인 성규호 옹이 터전을 마련했던 때는1850년경이라고 한다. 담장 안의 면적만 일만 평이라고 하니 전국으로 쳐도 열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규모다. 또한 대지면 모산리 창녕 성씨 전통가옥 14동과 경내 시설물 등이 산재한 2천311㎡에 대해 관광명소로 조성할 목적으로 경남도에 문화재지정 신청서를 제출하여 결국 문화재가 되었다. 성씨 고가는 대지 내에 안채, 사랑채, 창고 2동, 대문채, 화장실 등 총 6동의 건물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앞에 사랑채와 중문채를 두고, 안마당 좌우에 토담집 구조의 곳간 2동을 배치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1.5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창건후 계속적으로 배면의 쪽간을 확장 하여 內室化하여 평면상으로 겹집을 연상하게 한다. 평면은 좌측부터 부엌 1칸, 안방 1칸, 대청 2칸, 건너방 1칸,마루와 화장실(1칸)이 연접된 형태이다. 건축양식은 납도리 밑에 장혀로 수장한 장혀수장집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에 처마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이며, 건축형식은 안채와 마친가지로 납도리 밑에 장혀를 둔 수장한 장혀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간단한 3량 가이며, 처마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중문채는 사랑채 정면 우측에 연결되어 건축되어 있어 평면상으로 마치한 건물처럼 보이긴 하나, 입면상으로는 구분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2칸 측면 1칸이며, 누마루와 중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대문칸 1칸, 문간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석 외별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각주를 세운 형태로, 건축형식은 납도리 밑에 장혀를 둔 장혀 수장집이다. 상부가구는 간단한 3량 이며, 지붕은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이 건물의 안채와 사랑채는 일제강점기 중반(1929년)에 건축 또는 이건하여 해온 것으 로, 가구수법과 공간구성, 입면형식 등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다만 멀리서 보아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곳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사진)씨가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의심이 든다면 이곳을 찾아 아미사가 있는지 찾아보면 될 것이다.
성부자집으로 통하는 성씨 전통가옥은 지난 53년 일본에서 양파씨를 가져와 창녕에서 재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재경씨의 생가로 부지면적이 3만3천㎡로 본채와 별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고가의 정원에는 한반도 지도를 본따 만든 연못 등 각종 문화재급 자료들이 산재해 있다고 하지만, 누구나 구경할 수는 없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산이 배산을 이루고 있다. 앞은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배산임수의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주변은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보기 힘들 정도로 낮은 산들이 펼쳐져 있다. 낮은 산은 봉기하지 않아 산들이 낮고 길게 퍼져 아미사를 이루기 좋은 조건임을 알 수 있다.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산이 낮아 나무를 심어 조금은 높게 보이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느정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성씨 가문의 선조들이 은은함을 좋아하여 직접적인 햇빛보다는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그 은은한 빛을 특별히 좋아했기 때문이라 한다.
참고로 http://cafe.daum.net/uponhwawang에 들어가면 “황기 2600년 친일기념비 사라지다(창녕성씨고가)”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창녕성씨고가에 대하여 쓴 글이다. 이 가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글을 보게 되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글쓴이: 비사벌 번호 : 840조회수 : 962007.05.28 15:51
“” 2001년 두번째 성씨고가를 방문했을 때 이다. 성씨고가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우리나라 지도모양의 정원이 있는데, 그 정원을 지나쳐 뒤쪽 후원으로 가는 길옆에 1미터 쯤되는 삼각형 비석모양의 화강암이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글씨가 있을 법한 앞쪽에 시멘트로 덧칠한 흔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시멘트를 제거하여 보니 "황기(皇紀 2600年)"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처음보는 연호였다. 이상히 생각하여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황기는 "신무(神武)"라는 천황의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는데 BC660년이다. 즉 황기(皇紀) 2600년 소화(昭和) 15년(1940)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성혜림의 아버지와 성혜림, 오빠, 삼촌등이 일본 유학파였으니 일제강점기때 많은 일인들이 성씨고가를 드나 들면서 친분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념으로 "황기 2500년"이란 기념비를 세운것이다. 그 2002년에 다시가보니 비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관리자에게 어쭈어보니 부끄러운 것이라 하여 근처 땅에 묻어버렸다고 전한다.
부끄런 역사도 역사인데 부끄러운 것은 감추고 자랑스러운 것만 드러낸다면 역사의 교훈을 어떻게 배울것인가 ?
지금 성씨고가는 한창 복원작업에 바쁘다. 소유주는 등산복으로 유명한 브랜드 "North Face"를 만드는 영원무역 사장이란다. 2008년 람사총회때 사업상 영업을 하기 위한 사교장으로 활용할 모양이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장사만을 위해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황기(皇紀)」 이웃섬나라 「신무(神武)」라는 가공인물(?)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이 나라에서도 극우 존황파들만 사용하지 별 신빙성없는 기년법이다. 황기(皇紀) 원년: BC660년 황기(皇紀) 2664년 서기 2004년. “”
이러한 인식을 주었다면 매우 잘못된 일이다. 주인의 프라이버시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를 만인에게 보여주는 아량도 중요하다. 또한 인터넷의 게시자가 이야기 했듯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다. 또한 그러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해서 성씨 가문을 친일파라고 이야기 하고자 함도 아니다. 성씨 일가는 양파를 들여와 농촌 소득을 올린 역활을 한 가문이다. 그보다는 보여주는 아량과 문화재를 보호하고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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