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1차례씩 관산을 나서지만 1년에 2 번정도는 1박 2일의 지방관산을 한다. 2007년 12월 12일, 해남으로 관산을 떠났다. 여러곳을 설정하지만 미황사도 그중 한곳이다. 땅끝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미황사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다는 것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특히 최근에는 어느정도 불사가 마무리되어 있으며 템플 스테이로 유명해졌다. 사찰이란 산이 지니는 묘미도 무시할 수 없는데 미황사가 자리한 달마산의 산세는 가히 감동적이라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감탄을 준다,
해남하면 대규모 사찰로 대흥사와 미황사를 들 수 있다. 전국적으로 대찰이 없으랴마는 해남의 대찰은 나름의 의미가 크다. 대흥사는 표충사와 일지암으로 더욱 알려진 곳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도를 하는 스님들에게는 미황사가 더욱 영험한 곳일 수 있다.
대흥사가 산지형 사찰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과 비교하면 미황사는 바다의 향기가 풍기는 사찰이다. 바다에 바로 닿아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산으로 올라가면 희미하게 바다도 볼 수 있다. 미황사는 바다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창건이야기, 중창이야기를 비롯하여 경내의 성보에도 바다 냄새가 가득하다.
미황사가 자리한 곳은 달마산이라 부른다. 백두산에서부터 굽이치며 남으로 내려오던 백두대간은 지리산에서 다시 하나의 가지를 친다.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의 하나가 백두대간이 태백산맥인가 하는 것이다. 분명 다르다. 일부는 같지만 백두대간이라는 것은 우리민족 기준의 기맥이고 산맥은 일본 지질학자의 주장이다. 아무튼 백두대간은 곧장 부산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지리산에서 갈라지는 지맥은 호남정맥이다. 호남정맥은 남도의 평야를 가르며 내달려 이 땅의 끝에서 멈춘다.
달마산은 호남정맥의 끝이자 한반도의 끝산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땅끝, 혹은 토말(土末)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 국토에서 육지의 남단에 자리한 달마라는 이름이 벌써 불교의 색을 강하게 띄우고 있다.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수려하고 독특한 암릉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산 정상은 기암괴석이 들쭉날쭉 장식하고 있어 거대한 수석을 세워놓은 듯 수려하기 그지없다.
특히 바위산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경치가 압권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화산(火山)의 형태를 지닌 달마산의 등산은 쉬운 편이 아니다. 달마산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가 있다. 미황사 대웅보전 뒤편으로는 달마산 11개의 기묘한 암릉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앞에 펼쳐진 다도해는 갈길 바쁜 등산객들의 발을 붙잡는다.
해발 489m로 높지 않지만 평지에 해당하는 곳에서 불쑥 솟아올라 매우 높게 보인다. 특히 화산이 지니는 특징 때문에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고려 때의 스님 무외(無畏)의 글에 [원나라 때 남송의 큰 배가 이 산 동쪽에 와 정박한 뒤 한 벼슬아치가 산을 향해 절을 하고 여기가 바로 달마화상이 상주한 곳이라 하고 그림으로 그려서 가지고 갔다]는 일화를 전한다. 이로 보아 달마(達摩·범어 다르마:dharma)가 맞는 명칭이겠으나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달마산(達馬山)이라고 오기했다.
미황사는 고찰이다. 백제시대에 세워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됐다. 아담하고 오롯한 절이다. 현재는 어느 사찰 못지않게 잘 가꾸어지고제 모양을 찾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 사에는 과거의 아름다움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황사에는 유물이 적지 않다. 단청이 벗겨진 대웅보전은 보물 제947호이고, 응진전은 보물 제1183호이다.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 잡아 불교의 남방유입설을 증거하는 절이기도 하다. 절 마당에서 대웅보전을 바라보는 풍광이 볼만하다. 특히 부도가 많은 절로서 그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지만, 뒤의 암릉과 어울린 경치는 대둔사보다 낫다는 이가 적지 않다.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산이다. 미황사 사적비의 내용을 재해석하면, 인도 국왕이 한 척의 배에다 법화경과 화엄경, 비로자나부처 및 여러 불상과 불화를 가득 실고 왔다고 한다.이 해 홀연히 한 배가 사자포구(獅子浦口, 지금의 땅끝마을 갈두리)에 와 닿았는데, 배안에 금자 화엄경 80책, 법화경 7책, 탱화, 혹석 등이 있었다. 혹석이 벌어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는데, 의조(義照)화상이 꿈의 계시대로 소가 경을 싣고 가다가 지쳐 처음 누운 곳에 통교사를,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미황사를 지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이 설화는 정설로 굳어진 불교의 북방전래설과는 반대로 바다를 통한 남방 전래를 암시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미황사에서 또한 흥미로운 대상은 동·서 부도전이다. 이 부도전의 부도들에는 물고기, 게, 문어, 거북이 등 다른 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이 지방에서 민간신앙과 불교가 서로 깊이 얽혀 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미황사는 한 때 매우 컸으나 절의 중창을 위해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완도로 가는 도중 배가 난파, 젊은 승려들이 몰살한 뒤 군고단 준비에 진 빚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때문인지 달마산 기슭의 주민들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미황사 스님들 군고치듯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247번지 달마산(達摩山)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이다. 공룡 등줄기처럼 기암괴석이 하늘을 찌르는 12km의 능선 아래 웅장하거나 그렇다고 기죽지도 않은 모습으로 미황사는 당당하게 앉아 있다.
병풍처럼 달마산이 둘러싸고 있는 미황사는 급하진 않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사찰뒤를 벗어나면 천야만야의 절벽으로 막혀 있다. 앞에는 남해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요지다.
입구에서부터 서향으로 석축을 여러 단 쌓아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다듬어 건물을 배치하였다. 가장 아래 단에 범종각과 누각인 자하루를 두었다. 누각 밑을 통해 계단을 오르면 넓은 중정이 펼쳐진다. 중정 위쪽 단에는 대웅보전과 명부전 등의 전각을 배치하고, 그 좌우에는 조금 더 높은 축단에 산신각과 응진전, 달마전 등을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계단형식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산지형 사찰의 가장 아래 단에는 찻집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종각이 나타난다. 누각 바로 옆에 자리한 종각으로 2004년에 새로 지었다. 미황사대종중성기에는 창건 때 조성한 종이 오래되어 도광 14년 즉 1834년에 새로 종을 조성했다고 하나 종은 물론 종각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쪽 오른편에는 옥암당(玉岩堂, 1721년)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원래 북부도군에 있었으나 북부도군의 다른 부도를 모두 도난당해 이곳에 옮겨놓았다. 그러나 옥암당 부도 역시 제작시기가 적힌 상륜부 석재가 유실되고 몸돌만 남아있는 상태 이다.
대웅전 앞에는 한쌍의 괴불대가 있다.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입구 앞 건물지에서 100m쯤 채 못가서 양쪽으로 한 기씩 있으며, 대웅전 바로 앞에도 양쪽으로 한 기씩 있다. 모두 조선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간결하여 정상부분이 반원형인 직사각형의 기둥 형식이다.
대웅전 목조함에 보관되어 있는 괘불은 흔히 볼 수 없다.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가불을 묘사한 것으로 옹정 5년(雍正五年, 1727) 9월에 삼베바탕에 채색하여 조성한 것이다. 크기는 길이 11.70m, 폭 4.86m이며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를 독존의 입상으로 크게 묘사하고, 화면 상단 좌우에 구름을 타고 법회도량에 내려오는 화불 6위를, 하단 좌우에는 해상용왕과 용녀를 배치한 이 괘불은 조선후기 괘불이 대부분 석가의 영산회상을 주제로 많은 권속을 표현함에 반해 단순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화기에 따르면 괘불의 조성에 참여한 화사는 탁행(琢行), 설심(雪心), 희심(喜心), 임한(任閑), 민휘(敏輝), 취상(就詳), 명현(明現)이며, 이들은 18세기 전반 전라도 및 경상도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한 의겸(義謙)화파의 유파와 임한(任閑)화파의 인물들이다. 이 괘불은 다른 괘불처럼 야외 법회 때 걸기도 하지만 가뭄이 들 때 이 괘불을 걸고 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영험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1992년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를 지내고 서너 시간이 지나자 달마산으로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져 그 영험을 증명한 바 있다고 한다.
대웅전 앞 석조(石槽-구유) 2개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대웅전 앞뜰에 있고, 다른 하나는 사적비가 있는 부도전 건물 옆에 있다.
대웅전에 각 기둥의 주초석을 유심히 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육지의 절 중에서 가장 남단에 있는 덕분인지 여느 절집에서 볼 수 없는 남방불교 흔적이 뚜렸하다. 대웅전의 초석에 바다거북이나 게가 새겨져있다.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은 미황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건물의 공포 모습을 볼 때 18세기 중반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건축시기도 이 무렵으로 보고 있다.내부에는 후불벽을 만들고 조선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삼세불(木造三世佛)을 봉안하였다. 불화는 후불탱인 삼세불탱(三世佛幀, 1993년)과 좌측벽 불단에 신중탱(神衆幀, 1943년)이 모셔져 있다. 이밖에 법고대(法鼓臺)와 1979년에 주조된 중간 크기의 종(鍾), 그리고 괘불(보물 제1342호)을 담은 목조 괘불함이 들어 있다. 전각 앞에는 괘불대와 배례석이 남아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허튼층으로 쌓았다. 초석은 다듬은 것과 다듬지 않은 것을 섞어 사용하였다. 다듬은 초석은 원형주좌를 도드라지게 새긴 원형초석을 놓았는데 초석 표면에 연꽃 외에 거북이나 게 등 수중생물을 새겼다. 초석에 새긴 다양한 수중생물은 단순히 바다와 가깝다는 미황사의 입지적인 이유 외에도 민간신앙을 수용한 불교적 이해로 보인다. 고주에는 옛 단청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기둥 전체에 가득 그려진 용은 아직도 생동감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데 대웅전 보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전면에 쌓은 담장 사이를 개방하여 마치 돌문을 통해 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측면과 배면에도 석축을 쌓아 일곽을 형성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안에는 뒷벽과 좌우 측면벽에 붙여서 ㄷ자형 불단을 두고 그 위에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한 석가삼존불상과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및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불상 머리 위에는 봉황과 황룡을 조각한 판재를 걸어 닫집처럼 장엄하였다. 달마산 미황사 대법당중수상량문에는 나한전으로 적혀 있으나 현재 현판은 응진당이다.
사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부도밭이 있다. 부도밭은 대웅보전에서 남서쪽으로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도보 10여분 거리에 자리 잡았다. 여기에는 28기의 부도와 6기의 탑비등이 남아 있어 옛날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부도밭에서도 부도마다 거북, 게, 새, 두꺼비, 연꽃, 도깨비 얼굴, 용머리 등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부도밭은 다시 남쪽과 서쪽 두 구역으로 나뉘어 남부도밭에 21기, 서부도밭에 6기 등 제법 많은 다양한 형식의 부도를 모시고 있다. 이들 부도의 조성 시기는 대부분 18~19세기로 추정된다.
남부도밭은 창건설화에 전하는 통교사 터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탑비 5기, 부도 21기, 부도 부재 1기 총 27기가 모셔져 있는데, 연담 유일(蓮潭 有一) 스님의 부도를 비롯해서 벽하당(碧霞堂), 설봉당(雪峰堂), 정련당(井蓮堂), 미봉당(眉峰堂), 완해당(玩海堂), 정암당(晶岩堂), 송암당(松岩堂), 영월당(靈月堂, 1808), 오봉당(午峰堂, 1788), 송월당(松月堂), 백월당(白月堂, 1841), 죽암당(竹庵堂, 1821), 붕명당(鵬溟堂), 사봉당(師峰堂), 응화탑(應化塔), 혼허당(渾虛堂), 영허당(靈虛堂), 이봉당(?峰堂) 및 당호가 분명하지 않은 2기가 있다.
이러한 남부도밭의 부도는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대략 5열로 정리되어 있는데, 낭암대사부도가 그의 스승 송암당부도보다 앞 열에 있고, 송월당부도가 그의 제자인 응화당부도 보다 뒤에 있는 점 등을 미루어보아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뒷열의 부도가 연대가 올라가고 앞쪽으로 나올수록 점점 연대가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부도밭은 남부도밭에서 서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2~3분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들어가는 입구부터 영파당(靈坡堂), 창암당(蒼岩堂), 고압당(孤鴨堂, 18세기중엽), 감파당(減坡堂, 1768), 천연당(天然堂), 은곡당(銀谷堂, 19세기후반)의 부도가 있다.
남서 부도군을 합쳐 미황사의 부도는 형식적인 면에서 전통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부도가 15기, 방형의 탑신석에 지붕이 십자형을 띠면서 평면이 방형인 부도가 10기, 종형 및 기타 부도가 2기로 분류할 수 있다.
미황사의 부도는 이 지역이 바다에 가까운 영향 때문인지 부도의 기단부 또는 전면에 물고기, 게, 문어, 거북이 등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 외에도 학, 물오리는 물론 유교 민간신앙의 소재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토속적인 조각의 등장은 일반적으로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발전하면서 민중과 어울리는 문화를 형성해 나감에 있어 주변 조형성을 습합한 결과로 이해되고 있다. 즉 바다 생물의 표현은 어업이라는 이 지역 주민들의 생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탓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황사사적비는 부도전 앞 오른쪽 축대 아래에 위치하며, 계단을 타고 내려갈 수 있다. 미황사의 창건연혁을 기록한 비로 전체높이 385cm, 비신높이 292cm, 넓이 129cm, 두께 33cm이다. 조선 1692년(숙종 18)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쓴 이 사적기는 미황사의 창건 설화의 내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비개(碑蓋)는 팔작지붕형을 띠고 있는데, 등을 맞댄 두 마리 용이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고 중앙에는 타원형의 홈을 팠다. 용의 주변은 도식적인 운문으로 가득 메워져 있어 용마루에 있는 한 쌍의 용이 마치 구름 위를 비상하는 듯 보인다. 이 사적비는 귀부 없이 자연암석 위에 세워져 있다. 용이 그려진 비개석이 아름답고 장엄하다.
불상이나 경전이 바다를 건너 전해졌다는 설화는 적지 않다. 우리나라 불교는 4세기 말에 중국을 거쳐 북쪽지방에 전파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서남해안지방에는 “돌로된 배 한 척이 아름다운 범패소리를 울리며 땅끝(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고 시작되는 사적비(1692년)의 미황사 창건 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되었음을 말해 주목거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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