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윤선도유적은 사적 제4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남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1에 해당한다. 그러나 구시리로 찾아가면 찾아갈 수가 없다. 만인리로 찾아가야 한다.
금쇄동은 윤선도가 54세되던 1640년에 “금제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몇 일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단순히 금쇄동이라고 알려졌는데 부근의 문소동과 수정동이 모두 고산과 관계가 있는 유적지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후기의 정통한 풍수지리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문학만이 알려진 것이 사실이나 그의 풍수 능력도 알려진 바가 있다. 고산 윤선도에 대해 풍수의 최고 단계인 ‘신안’이라고 극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풍수학자이기도 한 정조 임금(주간동아 353호와 448호에 소개됨)이었다.
“참의 윤선도는 호가 고산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풍수지리 학문에 관해 본래 신안(神眼)의 실력을 갖추었다.”
정조는 고산 윤선도를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 학자라고 극찬하였다. 양반들이 풍수를 덕목으로 배운것에 비하여 임금들도 풍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조는 당대에 따라올 수 없는 풍수학자였다. 그리고 당대의 풍수학자로서 임금들은 모두 형기론을 추종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릉은 모두 형기론을 바탕으로 하며 물형론은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정조가 당대에 보기드문 풍수지리학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발언이 아니라 당연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곳 길이 갈라지고 금쇄동은 우회전하라고 표시가 있다. 부근은 현산고성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현산고성은 해남군 현산면에 위치한 병풍산(屛風山)을 중심으로 남동과 남서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병풍산은 해남읍의 옥녀탄금형의 병풍에서 유래된 산으로 금강산이 선녀라면 병풍산은 병풍에 해당된다.
현산고성은 고려시대에 남해안 일대의 왜구침입에 대비하여 조성된 산성으로 추정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등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지류 총서에는 현산고성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는 않다. 산성의 총길이는 1,472m, 가장 높은 곳은 285m, 가장 낮은 지역은 215m로 포곡식 산성이며, 성곽의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장축을 가지는 부정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현산고성과 그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금쇄동은 문소천을 둘러싼 고산분지형으로 산성의 동북편은 고산 윤선도가 22개의 비경을 노래한 자연으로, 맞은편에 병풍산과 마주보고 있다. 산성의 남쪽편은 소봉을 이루며 절벽으로 접근이 어렵고 멀리 남해의 가련봉, 향로봉, 도솔봉을 관망할 수 있다. 금쇄동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동북쪽으로 길게 놓여 있어서 약 4km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안으로 계속해 들어가면 마지막 지점에 집 한채가 있다. 이곳에 금쇄동에 대한 안내 간판이 있다. 지도가 그려져 있어 참고할 수 있다. 1킬로 이상을 가면 오른쪽 산기슭에 제각이 있다. 골짜기 산기슭에 동향하고 터를 잡은 영모재는 새로 지은 것 같다. 생전에 고산 선조가 기거하시던 집을 후인들이 고쳐 영모당(永慕堂)을 만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기거하였던 집이라고 한다.
이곳이 문소동이다. 이곳을 반경으로 하여 대략 500여 미터 정도가 문소동이라는데 정확하게 지역을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문소동은 민가 한 채가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고산 제각과 묘소가 있다.
제각에서 100미터 아래, 올라가는 방향에서 보면 좌측으로 100미터 아래지점에 고산의 묘역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곳에는 커다란 백일홍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입구의 자잘한 나무에 가려있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백일홍 앞에 큰 길이 있어 오르기 쉽다. 50미터를 오르면 좌측으로 신도비가 나타난다. 그 신도비는 상처를 입었다.
비문의 전서는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 - 1682) 선생이 썼다고 한다. 이조판서에 추증된 일과 영조 3년(1727)에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훈이 있어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하도록 하명된 사적 등이 기록되어있다.
이 길을 따라 약 100여미터를 지나면 넓은 길이 끝나고 산으로 난 작은 길을 오른다. 30여미터를 더 오르면 제법 넓어 보이는 묘역이 나타난다.
고산의 묘다. 고산선생의 연보(年譜)에 이 금쇄동을 발견한 것은 54세이던 인조18년(1640) 영덕에 유배를 다녀온 후였다. 이후 81세까지 광양에 유배를 당했다는 이론이 있는데 학문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으니 주장할 수 없다.
아무튼 고산이 이곳에 들어와 처음에 연동이 있는 덕음산에서 멀지 않은 수정동(水晶洞)에 머물다가 문소동(門簫洞)을 얻고는 이리로 거처를 옮겼다. 고향에 머물다가 꿈에 보았던 자리인 금쇄동을 발견하고는 수정동, 문소동과 더불어 금쇄동에 터를 잡고 은둔의 생활을 하였다.
윤선도의 묘는 제법 넓은 터다. 문학가로 더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풍수학사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명당으로 알려진 그의 고가(전남 해남 녹우당)와 무덤엔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고산은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왕릉 선정에 참여한다. 그는 여러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제 송시열의 묘는 혈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 형기학자들의 이론이고 송준길의 묘는 혈이기는 하나 아주 뛰어나지 않으니 그들의 반대가 융통성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정조는 고산이 추천한 곳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옆 화성의 융릉(隆陵)이다. 정조는 따로이 고산을 풍수의 신안이라 칭송했으니 이미 풍수역사에서 그의 입지는 확연하다. 정조가 ‘신안’으로 인정한 고산의 풍수학맥은 이의신(李懿信, 윤선도와 인척관계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됐다. 이의신은 해남 출신으로 1600년 선조 임금 어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떴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면서 선조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광해군 때는 경기도 파주 교하로 도읍지를 옮기자는 ‘교하 천도론’을 주장해 몇 년 동안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이다.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한다. 사실 명당에는 전설 하나 정도는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간혹 가문의 명당을 유력하게 하거나 드러내기 위해 집안에서 만드는 전설도 있다. 물론 시대가 맞지 않는 전설도 있고 찾아가 보면 전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당도 있다. 풍수를 배운 학자적인 판단과 입장으로 보면 전설과 어울리는 명당이라는 것은 전라도에 자리한 하서 김인후의 조상, 즉 인천 김성수의 17대 조모의 묘와 충청도에 자리한 남씨 가문 3대의 묘, 경기도의 남재 묘 등이다.
풍수에서의 한 줄기인 형기론을 바탕으로 볼때 전혀 믿어지지 않는 전설의 묘는 양주의 홍씨 가문의 묘와 여주의 권씨 가문의 묘와 같은 경우다. 이론적으로 형기론과 이기론이 대립하기도 하지만 두가지 이론에 모두 부합하여야 하고 먼저 형기론에 부합하여야 하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묘에 유명인의 전설을 끌어다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고산 윤선도의 묘에는 전설이 있다. 고산 윤선도는 당대의 학자로 해남으로 귀양을 가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해남 윤씨의 부귀를 가져다주고 1만8천 가구의 후손으로 번창하게 한 명당으로 유명하다.
본래 윤선도의 묘 자리는 그의 고모부인 명풍(名風) 이의신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아놓은 자리였다고 한다. 윤선도와 이의신이 같이 지낼 때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가 한식경이 지나면 들어오기를 자주 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던 윤선도는 필시 이의신이 자기가 죽은 뒤 쓸 묘 자리를 구하러 나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술을 취하게 권한 뒤 곯아떨어지게 하였다. 이의신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윤선도는 이의신이 항상 타고 다니는 나귀를 타고 채찍을 휘둘렀다고 한다.
나귀는 밤이면 그 주인이 매일처럼 다녀오는 길을 따라 내달렸다. 비슷한 이야기로 삼국을 통일한 말도 같은 길을 달려갔다고 한다. 아마도 짐승은 자신이 주로 가는 길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영문을 모르는 나귀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더니만 어느 산중턱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윤선도가 주위를 살펴보니 나귀 똥이 많이 널려있고 담배를 피운 흔적이 있어 이의신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천하의 대명당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가묘를 해놓은 후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잤다.
다음날 고모부인 이의신에게 “제가 신후지지를 하나 잡아 놓았는데 좀 보아주십시오.”라고 능청을 떨며 말하였다. 당대의 명당이라는 이의신이 윤선도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보니 자기가 잡아 놓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역시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로구나!”하면서 좌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이 좌향에 대해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다. 학자들 마다 이야기가 분분한데 결과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쪽에 심증이 간다. 즉, 이 묘를 잉혈로 판단하고 전순을 찾는다면 전혀 문제가 없으며 좌선방향이 넓어진 것은 그곳이 주된 맥이기 때문이다.
고산 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덤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다. 이 명당의 태조산이라 할 수 있는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이 자리한 남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또다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몸을 360도 돌려 거의 정북에 가깝게 좌향(巳坐亥向)을 정하고 있다.
용의 흐름을 파악하면 두륜산을 이루는 호남정맥이 내달려 두륜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한줄기는 미황사를 이루는 달마산으로 달리고 다른 한줄기는 다시 북서방으로 역행하듯 올라가 오도치 옆을 지나 급격히 낮아져 백도치를 지난다. 이 백도치로 806번 도로가 지나게 된다.
백도치를 굴곡으로 넘은 용은 병풍산을 이루어 기봉하였다가 급하게 용을 틀어 오시미재에 이른다. 오시미재에서 기봉한 용이 방향을 틀어 남서방으로 휘어져 돌아 약 2킬로 이상을 달려 오십치를 이룬다.
오시미재와 오십치 사이에서 한줄기 용맥이 남으로 뻗어 마치 또아리를 틀 듯 금쇄동을 감아돈다. 마치 멍석을 튼 모양의 기맥이다. 대개 용들은 변화를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또아리를 트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마치 달팽이 껍질이나 소라 껍질 마냥 나선형으로 뱅뱅 돌아가다가 맨 끝에서 하나의 혈을 맺는다.
나선형으로 뱅뱅 감아 들어가는 경우를 특격으로 치며 큰 명당이 성국된다. 이 무덤의 안산과 조산에 해당되는 산들은 이 무덤에서 거꾸로 거슬러 360도를 돌아나가면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형국의 용을 회룡(回龍) 혹은 반룡(盤龍: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과 같은 산줄기)라 부른다. 많은 풍수지리서의 물형도(物形圖)에서는 이를 반사형(盤蛇形: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국),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 자신이 처음 출발하였던 산을 되돌아 보는 형국) 혹은 반룡은산혈(盤龍隱山穴: 똬리를 틀어 명당을 숨기는 형국) 등으로 표현한다. 고산의 무덤이 자리한 혈장은 그 크기가 왕릉에 버금간다. 윤선도의 풍수지리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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