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구름이 머문다는 뜻의 운주사이지만 일부에서는 배가 떠난다는 뜻의 운주사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민족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운주사는 화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26㎞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태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개천사, 서쪽에는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건립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 이곳 지형이 떠나가는 배의 형국으로 되어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하여 일명 천불천탑이라 한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이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도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라고 적혀 있다. 즉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 왔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 차례의 발굴조사와 두 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와 야지에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여러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아 국가가 지원하여 훌륭한 도공을 보내어 조성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힘을 모아 조성한 것이라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넓적하고 둥근 옥개석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 석질로 빚어 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와불이 일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다. 해발 100m 내외의 비교적 낮은 야산지대로서 불적은 평지와 야산 등 반경 약 200m범위내에 산재되어 있다.
1984년 전남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유적은 석탑18기 석불52구이나 석불에 있어서는 불두만 남아있는 것이 20여구가 더 수습되었다. 전남대 박물관의 발굴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유물로 높이 18.8Cm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있다. 도금된 금색은 완전히 퇴색되었으나 나발의 머리와 큼직한 육계가 있는 준수한 작품으로 고려초기 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불상은 운주사 입구 석불좌대 밑에서 수습되었는데 전남지방에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예라 하겠다.
운주사지는 1984년 조사에서 홍치 8년명 암막새 기와와 함께 해무리굽 청자편, 범자문 수막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경내의 많은 석불 및 석탑은 그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비록 정제된 수법은 아니나 이토록 많은 숫자의 석불석탑이 소장된 사찰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없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의 지방적인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예로 보아 고려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러한 불사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중기 이후까지 계속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주사 사역은 계곡 안의 평탄지대와 계곡 좌측, 계곡 우측, 사역 뒤편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주요 전각은 계곡 안 평탄지대 뒤편에 자리 잡았고, 그 앞에는 석탑과 불상군이 포진해 있다.
초입에서부터 9층석탑, 7층석탑, 광배를 갖춘 불상, 7층석탑, 석조불감, 원형다층석탑이 차례대로 서 있다. 그 뒤로 본격적인 전각 영역이 펼쳐진다. 전각은 중앙축에 대웅전을 두고 그 좌우로 각각 승방과 명부전이 있고, 대웅전 앞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명부전 뒤로는 산록에 산신각이 자리 잡았다. 승방 전면에는 종각을 두고 종각 옆으로 대웅전 축에 맞춰 산문 기능을 하는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웅전 좌측 승방 뒤로는 후원을 마련하였는데 공양간, 해우소, 요사, 승방이 있다. 계곡 좌측에는 밑에서부터 5층석탑, 7층석탑, 시위불, 와불, 칠성바위, 석탑, 연화대좌 등이 남아 있다.
계곡 우측에는 거지탑과 5층석탑이 산록에 있다. 사역 뒤편으로는 원형구형탑, 4층석탑, 명당탑, 마애여래좌상, 공사바위 등이 있다. 석불군은 주로 계곡 평탄지 도로 우측에 다양한 석불군이 있고, 사역 뒤편에는 또다시 석불군이 있으며, 좌측 시위불 아래쪽에 또 하나의 석불군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여러기의 석불이 보이는데 이는 그리 오래된 불상은 아니다. 곧 정면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운주사9층석탑이 자태를 뽑낸다. 운주사 초입에 있는 탑으로 높이 10.7m에 달하는 세장한 형태가 특징이다. 기단은 자연 암반을 그대로 사용한 점도 색다른데 암반을 상부만 방형으로 다듬어 탑을 앉혔다. 기단은 4단으로 조출하고 그 위에 초층 탑신을 바로 올렸다. 탑신석은 초층만 세장하고 2층 이상은 초층에 비해 체감율이 적은 편이다. 탑신과 옥개석은 9층을 형성하였고 그 위는 상륜부를 올려 마감하였다. 초층 탑신은 한 돌이 아니라 면석과 우주석으로 이루어졌고 얕게 탱주와 우주를 새겼다. 2층 탑신 이상은 모두 한 돌로 탑신석을 만들었고 표면에 동일한 무늬를 새겼다. 무늬는 마름모를 2중으로 한 곽을 만들고 그 안에 4엽의 꽃을 양각으로 새겼다. 옥개석은 9층 모두 네 귀퉁이 처마가 약간 위로 반전한 형태이며, 지붕돌 하부에 추녀와 방사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직선 무늬를 새겼다. 양식적으로는 백제계 석탑과 상통하는 탑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에 새긴 문양은 물론 비례감 등에서도 유례가 드문 탑형이다.
오른쪽 바위 아래는 석불군이 있다. 석불군은 보물 796호인 9층석탑 동쪽 암벽에 위치하며, 좌상이 1분, 입상이 6분, 대좌 6개가 남아있다. 높이 약8m, 너비 약20m의 암벽 중앙에 좌상을 배치하고, 그 오른쪽에 입상 5분과 대좌 5개를 배치하였다. 석불좌상 뒤편에서는 발굴조사 시에 금동여래 입상과 금동보살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한결같이 장방형의 판석을 이용한 듯 볼륨감이 없으며, 얼굴은 세로로 긴 타원형으로 눈썹과 코의 흔적만 보이며, 목에는 삼도를, 신체에는 선각의 옷주름을 묘사하였다.
이어 7층석탑이 연이어 줄을 맞추어 서 있다. 이중 앞쪽의 7층석탑은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직선적이고 다소 가파른 처마의 선,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예전 백제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운주사 탑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파격적이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 흐르는 듯 하다.
이어 두번째 칠층석탑이 나타난다. 탑신에 개성적인 교차문양을 가지고 있는 날렵한 인상의 칠층석탑이다. 기단석도 잘 다듬어서 이곳으로 운반하여 그 위에 직사각형으로 돋을 새김하여 탑을 세웠다. 운주사의 탑의 기단부나 탑신부는 네 개의 직사각형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건립하였다. 때문에 그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네개의 돌판을 이어 올려 육중한 옥개석의 무게 중심을 지탱하고 있는 그 신비로운 건축술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교차문양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름모꼴들의 연속이다. 동서남북 사방의 부처의 기운이 이곳으로 한데 모여 사방팔방 부처의 세계가 아닌 곳이 없이 자비의 빛으로 온세상을 환하게 밝히기를 염원하는 깊은 뜻이 깃든 게 아닌가싶다. 다음에 모습을 드러내는 공배를 갖춘 석불좌상은 일견 마애불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石佛坐像)은 9층탑과 석조불감 사이에 위치하는데, 사다리꼴의 판석에 석불좌상이 고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원만한 긴 타원형으로 눈언저리보다 약간 높은 눈썹과 기다란 코, 두툼한 입술을 갖추었다. 머리와 이마의 구분선은 보이지 않은데, 미간에는 도드라진 백호를 묘사하고, 육계는 윗부분이 파손되었지만 높게 표현되었다. 짧은 목에는 삼도의 묘사가 보이지 않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식으로 걸쳤는데, 옷주름은 왼쪽 어깨와 오른쪽 소매에만 사선으로 음각되었고, 옷에 가려진 손의 모습은 무릎 바로 위에서 명치 부분으로 모아지는 형태이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길상좌이며, 다리에 온통 옷주름이 음각되어 있다. 광배는 사다리꼴 판석으로 상단 일부가 파손되었는데, 두광과 신광의 구분 없이 전체에 소용돌이 모양의 화염문을 표현하였다. 전남대학박물관에서 실시한 4차 발굴조사에서는 이 불상의 하부 유구를 조사하였는데, 주변에서 조선시대 기와편들이 출토되어 현재의 유구상태로는 목조 감실 같은 간이 건물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석불군은 최초 입구에서 경내 쪽으로 10여 미터 떨어진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의 암벽에 의치하며, 입상이 9분, 대좌가 10개가 남아 있다. 암벽은 높이가 약5m, 너비가 25m로 수평방향의 암결이 있으며, 하단은 많이 떨어내어져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7분의 협시불을 배열하였는데, 가석불군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로 묘사되었다. 중앙 대형입상은 긴 귀와 코를 가진 세로로 긴 타원형에 얼굴에 머리에는 육계를 갖췄으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다. 옷주름은 선각으로 왼쪽어깨에서 흘러내려 하체에서는 U자형으로 묘사되었는데, 법의가 몸에 밀착된 듯이 두 다리를 구분하는 수직선을 묘사하였다. 대좌는 복련의 연화를 조각한 연화대좌인데,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다시 나타나는 7층 석탑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석조불감과 불상(石造佛龕 佛像)이 나타난다. 원반형 연화탑 남쪽 5m 지점에 자리한 불감으로 보물 제797호다. 재료는 화강석이며 높이 5.5m, 폭 5m이다. 기단 위에 방형 몸체를 올리고 그 위는 팔작지붕 형태를 만들었다. 불감 내부에는 앞뒤로 석불 2체를 앉혔는데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일반적으로 불감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 형태의 공예적인 형태인데 운주사 석조불감은 외부에 조성된 특이한 예이다. 불감은 맨 밑에 4각의 평판석(平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로 4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석실을 조성하여 이를 받치게 하였으며, 석실 위로 팔작(八作)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현재 석불 앞은 개방된 상태지만 원래는 석실 앞에 문을 달았었다. 문을 달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내부에 봉안된 두 불상은 각각 남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여래좌상이다. 아울러 계곡 밖과 안을 바라보고 있다. 남쪽을 향한 불상은 전체높이 255㎝이다. 원만한 둥근 얼굴에 소발의 머리를 갖추었는데, 육계부분은 파손되었다. 가느다란 눈썹과 콧등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되어, 코는 길고 예리하게 표현되었으며, 목에 삼도(三道)가 음각되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쳤으며, 도식적인 옷주름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위에 얹은 모습으로 손가락까지 묘사되었다. 다리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형태로 길상좌에 속하며, 발바닥과 발가락을 제외한 다리부분에도 도식적인 옷자락이 표현되었다. 광배(光背)는 사다리꼴 형 판석에 두광과 신광 구분 없이 구불구불한 문양이 선각되어 있는데 화염문(火焰文)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북쪽을 향한 불상은 전체높이 264㎝로 원반형 연화탑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남쪽을 향한 불상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 얼굴은 원만한 둥근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과 눈, 희미한 입을 갖추고, 귀는 형태만이 남아있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다. 머리에는 육계가 없고, 목은 짧은데 삼도가 뚜렷이 묘사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걸치고, 두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주름이 가슴부분에 모아 쥔 두 손으로 흐르다가 결가부좌한 다리까지 신체 전면을 덮고 있다. 옷 속에 싸인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주형(舟形)의 판석에 위쪽이 가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선각되었는데, 이것도 화염문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감실 안의 두 불상은 단순화되고 경직된 불상 양식과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또다시 나타나는 석불군은 불감의 옆쪽에 자리하고 있다. 최초의 석불군과 연이어 나타나는 두 번째 석불군의 연장선상의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의 암벽에 위치하는데, 앞서 석불군의 암반과는 연결되지 않는 좌우로 양분된 암벽에 위치한다. 암벽높이는 오른쪽이 4~5m, 왼쪽이 8m이고, 너비는 오른쪽의 것이 11m, 왼쪽이 18m로, 오른쪽에 대좌 6개와 불두 2분, 석불입상 2분이 있고, 왼쪽에 방형과 원반형 대좌에 불상 3분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는 방형연화대좌를 갖춘 불좌상이 있고 그 좌우로 입상의 협시불이 배치되었는데, 중앙 불좌상은 두 손이 결실된 채 다른 불상들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는데, 얼굴은 긴 귀와 코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복련이 묘사된 방형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있다. 좌우석불은 기타 불상군의 석불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형 다층석탑(圓形多層石塔)은 탑의 독특한 형태로 인해 연화탑 또는 호떡탑으로 불린다. 원형 지대석 위에 원형에 가깝게 다듬은 기단을 놓았는데 상부는 앙련을 얕게 새긴 갑석을 덮었다. 갑석 위에 단면 원형을 다듬은 탑신석을 놓고 버섯처럼 외곽을 접은 옥개석을 올렸다. 현재 6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다. 기단은 한 돌로 만들지 않았는데 4매의 돌을 다듬어 조립하고 그 안은 잡석으로 채웠다. 탑신석에는 가로로 두 줄을 새겨 장식하고, 옥개석 바닥면에도 두 줄의 선을 얕게 음각하였다. 옥개석을 원반(圓盤) 모양으로 다듬은 이 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유례가 드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네 번째 석불군은 원반형 연화탑의 정측면의 평지에서 10m쯤 높은 동쪽 산기슭의 암벽에 위치하고 있다. 입상 4분, 대좌 8개가 남아 있다. 이곳은 암반 앞면을 다듬어 높이 2m, 너비3m의 암벽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기대어 모셨는데, 현재 불상 4분이 남아 있으나 대좌가 8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4분의 불상이 다른 곳으로 이동된 듯하다.불상의 형태는 여타 불상군의 불상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입체감이 결여된 비형(碑形)에 눈썹과 긴 코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세로로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긴 귀와 육계가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신체에는 옷주름이 선각되어 있다. 이 4분의 불상 중에는 특이하게 발가락이 자세히 표현된 불상 2분이 있는데, 약간 벌어진 듯이 표현된 발은 무늬가 없는 방형대좌위에 놓여져 있다.
이제 사역이 나타난다. 그러나 운주사의 사역은 그리 눈을 잡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석불과 불상은 물경 천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지만 당우들은 새로이 지어진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눈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운주사 역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법칙을 지키고 있으며 두개의 계곡이 만나는 상부에 지어져 전형적인 두물머리의 형상으로 명당지임에는 틀림없다.
대웅전을 지나자마자 나타는 탑은 원형구형탑이다. 마치 스님들의 그릇인 발우를 쌓아놓은 모양이다. 날씬하게 솟아오른 기단면석에 놓인 넓고 둥근 초가지붕 같은 기단갑석 그 위로 점차로 작아지는 육중한 원형의 옥개석(지붕돌)이 탑신을 과감히 생략해 버린 채 겹겹이 올라가 있다. 엄격한 형식과 규격을 뛰어넘어 더 본질적인 부처의 세계로 대자유의 정신으로 접근하려고 애쓰는 염원이 운주사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이 발우형 석탑이야말로 으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이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중생을 어서 구원하러 오시라는 염원으로 발우형석탑을 세웠던 듯 싶다. 퇴수 후 가장 큰 발우 순으로 밑에 놓고 그릇을 쌓아올렸던 삶의 지혜처럼 둥근 돌과 돌을 포개어 쌓아올린 정성과 사상이 돋보인다. 저렇게 둥글고 무거운 돌을 어떤 건축 기술로 다듬어 쌓아올렸을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롭다. 이 탑은 일제시대 때 찍은 사진에는 7층이었으나, 그 후 3층이 소실된 것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대웅전에서 공사바위 가는 길을 따라 원형구형탑을 지나 북서쪽으로 약 20m 쯤 떨어진 암벽 남쪽에는 다시 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다. 좌상 2분, 불두 1분을 포함하여 입상 3분, 대좌 1개가 남아 있다. 이 불상군은 배열 상태가 상당히 흐트러져 있는데, 본래상태와 유사한 상태로 보이는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왼편에 소형의 석불좌상을, 오른편에 불두 1분과 입상의 불상 2분을 모셨다. 암벽은 높이 15m, 너비 20m로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암반과 연결되어 중앙부와 하단을 깎아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감실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감실 형태의 구조물 흔적으로 보이는 길이 14cm, 너비 8cm, 깊이 6cm의 구멍 4개가 좌우 상하단에 나 있다.
중앙 불좌상의 오른쪽에 있는 불입상 2분은 얼마 전까지 서로 어깨를 기대로 있어 ‘부부부처’라고 불렀는데, 대좌로 보아 원래의 상태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현재는 따로 떨어져 모셔져 있다. 이 두 불입상 옆에는 불두가 하나 있는데, 눈썹과 코를 잘 다듬은 이 불두에는 중심에 수직으로 5개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돌을 쪼개려는 채석구멍과 달리 뚫려있어 그 연유에 대해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산신각을 지나 올라가면 두개의 탑이 나타난다. 그중 4층 석탑은 분황사지 전탑 양식의 석탑을 빼어 닮은 완전한 신라탑의 유형이다. 전탑양식은 벽돌을 쌓아 만든 탑으로 그 형식에 있어서 옥개석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목조 기와지붕의 양식이 아니라 계단식 지붕형태를 보여주는 점이 그렇다. 지금은 4층만 남아있으나 실재로는 7층 혹은 9층은 되었음직한 크기다. 일설에는 이 탑을 건립할 때 맑은 날 거대한 이무기가 감고 올라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그 요물을 벌하였는데 그때 이렇게 파손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운주사의 석질은 사토에 모래와 자갈이 섞인듯한 토속적인 돌담양식의 인상을 주고 있다. 반들반들 윤기가 나지 않고 거친듯하면서도 다정다감 포근한 인상을 더해준다.
그 위로 명당탑이 나타난다. 운주사의 주산인 거북이산(영귀산)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탑으로써 넓적한 하대석에 사각형의 기단면석 위에 놓인 둥근 원반형 석탑이다. 운주사의 석질은 이렇게 시루떡처럼 잘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특이한 형식의 석탑 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넓고 둥근 돌을 둥근 탑신을 세운 그 위에 층층이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옥개석 밑면을 보면 연화무늬가 둥그렇게 새겨져 있다. 지금 남은 탑은 자세히 보면 그 석질이 서로 다른면을 발견할수 있다. 이곳이 천년을 지배할 황제가 태어날 천년 군황지혈이라 하여 명당을 찾는 무리들에 의하여 그 훼손의 정도가 남다르다. 앞의 4층 석탑도 훼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지형적으로 살펴보면 두개의 탑이 위치한 이곳은 물형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리고 자리가 완연하여 응기된 곳이라 음택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탑이 부처의사리를 모시기 위한 구조물인 것이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 불경을 수장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곳에는 부도탑을 세웠다 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남쪽을 향해 있는 마애불좌상은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곳, 즉 운주사 불적과 일대의 풍경을 시원스레 관망할 수 있는 공사바위 바로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다.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새긴 마애불은 운주사 계곡 안의 모든 돌부처와 석탑과 칠성바위, 그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다. 균열로 인해 탈락이 심하나 암벽의 요철 부분을 그대로 살려 얕게 부조한 이 마애불은 타원형의 얼굴에 희미하게 눈과 입이 묘사되었고, 도드라진 긴 코와 긴 귀를 지녔다. 머리와 이마는 거의 없이 육계만이 두툼하게 솟아 있고, 목은 두툼하고 긴데 삼도가 선각되어 있다.
마애불을 지나면 공사바위가 나타난다. 공사바위(工事巖)는 불사바위로도 불린다. 운주사 사역 가장 뒤편 산록에 있는 자연 암반이다. 이곳에서 도선 국사가 운주사 공사현장을 지켜보며 공사를 감독하였다고 하여 공사바위로 이름 붙었다.
운주사의 주산은 금체를 지닌 영귀산이다. 영귀산 8부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보인다. 바위 이곳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공사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 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파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 이곳에 이 바위 한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도 신비로운데 또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고난 받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한 선인들의 혜안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내려와 사역 앞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무 계단을 오른다. 이곳을 향해 가면 7층탑과 5층탑이 있고 시위불, 와불, 그리고 칠성바위가 있다. 와불 방향으로 향하다가 계단을 오르자 마자 바위를 만난다. 이곳에는 5층탑과 7층 탑이 서 있다. 두개의 탑은 너른 바위를 기단석으로 해서 서있다. 이중 7층탑은 비스듬이 깎아지른 바위 위에 홈을 파서 탑을 세웠는데 그 건축 기술과 과학적 재치가 신비롭다. 얇은 옥개석에 처마귀가 솟은 걸로 봐서 백제계탑이다. 볼록 솟은 교차 문양은 동서남북 사방불을 상징하는 듯 싶다. 5층탑은 옥개석의 생김이 직선적이고 육중하다. 역시 신라계 석탑양식이다.
조금 더 가면 석불군을 만난다. 석불군은 운주사의 서쪽 산등성이 와불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암벽 아래에 위치한다. 높이 5m, 너비 12m의 거대한 암반 위에는 석탑 2기가 모셔져 있고, 그 남쪽 측면에는 3× 4× 2m의 공간을 형성하여 암벽 감실을 조성하여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불상 2분, 입불상 8분을 안치하였다. 이 외에도 이 암벽에는 높이 4m 지점에 지름 1m정도로 암벽이 다듬어진 흔적이 있어 이곳에 대형불상을 안치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불좌상은 여타의 불상군보다 마모가 심하지 않아 얼굴에 눈, 코, 입의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으며, 법의는 두 어깨를 감싸 덮는 통견식으로 착용하였다. 옷주름은 선각으로 띠를 이루었으며, 두 손은 모두 결가부좌한 무릎위에 얹었는데,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왼손은 손바닥으로 위로하였다. 대좌는 방형의 연화대좌를 갖추었는데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장식이 없다.
와불이 있는 곳을 알라는 표시를 따라가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륵부처 모양의 석불이 서 있다. 우뚝 선 시위불은 와불로 가는 산 정상 바로 아래 부분에 모셔져 있다. 와불을 지킨다하여 시위불 또는 머슴부처라 불리기도 한다. 조각이 뚜렷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희미하지만,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머리에는 관모를 쓴 것처럼 단이 진 육계와 머리와 이마를 구분하여 표현하였다. 이마는 한 단 낮고 좁은데, 그 아래로 눈썹과 연결된 오똑한 코와 초생달형의 눈이 묘사되어 있다. 입은 희미하여 잘 알 수 없고, 귀는 이마 위에서부터 입 부근까지 길고 좁게 묘사하였으며, 볼은 도톰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지 않았고,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낸 우견편단식으로 보이나 왼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묘사되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은 상체 전면을 휘감고, 하체에서는 양 다리를 구분하여 ‘U'자형으로 흐르다가 무릎아래에서 군의(裙衣)를 묘사한 듯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수인은 오른팔을 들어 가슴에 대고 왼팔을 쭉 뻗어 왼쪽다리에 붙이고 있는데 시무외 여원인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암반위에 세워진 이 불상의 크기는 좌상의 와불 오른쪽에 길이 6m, 너비 95~115cm, 두께 68cm의 채석흔적과 유사한데, 와불 옆에서 떼어냈다는 구전상의 이야기와 대체로 부합되어, 와불 옆에서 떼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 계곡의 산 정상에 위치한 와불은 석불좌상과 입상이 나란히 누워 있어 ‘부부 와불’로 불리기도 하였다.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조각된 이 불상은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온다. 먼저 좌불을 살펴보면, 달걀형의 얼굴에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한 눈썹과 코, 거칠게 조각된 긴 귀를 갖췄으며, 소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표현되지 않았다. 육계는 다른 석재로 불상의 머리 오른쪽에 놓여져 있는데, 이를 두고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잘라낸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으로, 그저 암반이 부족하여 취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이마는 머리부분보다 한 단 낮게 깍아 경계지었으며, 목은 길고 넓은데 삼도가 표현되지 않았다. 신체는 머리에 비해 좁고,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식으로 걸쳤다. 옷주름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 가슴부분에 모아 쥔 두 손으로 모아졌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수평의 원호로 선각되었다. 수인은 옷자락에 가리워져 확인하기 어려운데, 합장인이거나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지권인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입불은 조각수법에 있어서는 좌불과 흡사함을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기다란 얼굴에 반달형 눈, 기다란 코와 두툼한 입술에 긴 인중을 묘사하고 있다. 눈 주위는 눈썹을 돌출돼 보이게 하기위해 한 단 낮추어 조각하였으며, 귀는 깨어진 채로 흔적만 남았다. 이마는 좌상과 마찬가지로 머리부분보다 한 단 낮게 표현하였는데, 머리 위 육계는 꽃봉오리 모양으로 경계 지어져 있다. 신체 역시 머리보다 좁고, 신체로 이어지는 목은 길고 넓지만 삼도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법의는 왼쪽 어깨를 드러낸 좌견편단식으로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서 발까지 흐르는 옷주름을 선각하였다. 수인은 왼팔은 들어올려 오른쪽 가슴에 대고 오른팔은 구부린 채로 손들을 배어 댄 어색한 시무외여원인을 결하고 있다. 이 두 석불은 다리부분이 약간 높은 머리가 남향인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다리부분에 떼어내려 했던 흔적이 있어 전해오는 설화처럼 세우려 하였는지, 미완성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방향을 틀어 칠성바위로 향한다. 산길을 가다보니 채석장이 나타난다.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을 제작에 쓴 석재를 채취하고 운반한 유적을 주변에서 발견한 것은 1989년 조사 당시 거둔 큰 수확이다. 와불에서 칠성바위로 가는 서쪽 산허리 주변의 암반에는 불상용 돌을 채취한 채석장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채취한 암반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마멸된 암반의 흔적 등을 확인하였다. 이런 유적을 통해 석불과 석탑의 제작과정, 운반 방법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운주사의 이른바 ‘와불’이 있는 산등성이에서 20m쯤 밑으로 내려오다 보면 일곱 개의 원반형 바위가 있다. 언뜻 보면 원반형 칠층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북두칠성이 땅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다가 배열상태와 원반지름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광도(光度)]와 매우 흡사하다. 각 돌의 지름은 28~385cm 정도이고, 제작 시기는 주변 불적과 함께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정황에 따라 이 7개의 바위를 북두칠성석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칠성석은 칠성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칠성신앙은 본래 불교에서의 북진(北辰) 묘견보살에 대한 신앙이다. 이 칠성신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여러 사찰에 칠성각의 형태로 남아있다.
칠성바위 앞 탑 측면 암반에는 불상 받쳤던 연화대좌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금 석탑은 없지만 탑을 세웠던 흔적이 연화대좌 좌측 암반 위에 남아 있는데 탑을 곧게 세우기 위해 경사진 암반에 층단으로 홈을 팠다.
사람들이 탑을 뜯어다가 상석·주춧돌로 만들어 쓰기도 하고, 아이가 없는 부부가 부처의 코를 떼어다가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등의 미신을 믿어 떼어갔기 때문에 석탑과 석불의 수효가 점차 줄어들었다. 도선(道詵)이 한국의 지형을 살펴보니 배가 움직이는 모습을 닮아 그대로 두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해 노의 위치인 이곳에 천불천탑을 하루 동안에 도력으로 만들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운주사는 아무리 둘러봐도 깊은 계곡이나 높은 봉우리 하나 없다. 주산도 높은 산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천이다. 지난날의 영화를 뒤로하고 스러져버려 새로이 신축한 대웅전 뒷산 중턱 알같이 박힌 공사바위에 올라 내려다보면 운주사는 골짜기를 따라 물길이 거슬러 오르듯 터가 배처럼 길쭉하다. 그래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그 사이 좁은 계곡과 골짜기에 석탑과 석상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천불천탑은 수많은 불탑과 불상이 있다는 이야기이지 꼭 집어 각각 천 개씩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에는 정말로 천불천탑이 있엇을지 모르나 지금은 많다 라는 의미로 밖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의 모양을 보면 단순히 우리나라의 불교적 사상만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밀교에서 말하는 천불을 조성해 모시는 천불신앙과 운주사의 중심 법당처럼 보이는 보물 제 797호 석불감쌍배불좌상에 보이는 두 부처를 앞뒤로 모셔 음양을 나타내는 밀교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창건 기록과 설립 목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수다.
전설이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운주사가 정말로 비보적인 목적으로만 세워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선국사의 역할이라는 것이 일정부분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국가적 비보사찰을 많이 건립한 것은 사실이므로 비보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탑의 모양과 부처의 모양으로 보아서는 일정하지 않아. 국가가 대대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불심 가득한 지방 토호의 재원으로 조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칠성바위가 보여지듯 칠성신앙 같은 토착적 샤머니즘도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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