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아가기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196-2번지
* 관산 주안점
금선사의 입지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다. 목정굴이 기도처로 알려져 있지만 사찰의 입지에서는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지나치게 협소한 골짜기이기 때문에 충(沖)이 적지 않고 계곡풍의 영향을 받는다. 바위가 많아 기의 영향이 적지 않은데 지나치게 강한 것이 흠이며 물소리가 들리는 것도 좋지 않다.
오래 머물지 않는 기도처로는 손색이 없다. 그러나 장기간 머물기에는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다. 과거에는 계곡에 절을 지어 아랫마을에 물난리가 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일종의 비보사찰을 많이 지었다. 즉, 건물의 뼈대로 거친 물살을 막거나 부처의 가피력으로 홍수를 막기 위한 비보의 역할을 금선사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설화
목정굴에는 여러 가지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대표적인 설화는 정조와 관련있는 설화이다. 왕가와의 설화는 바로 이 절이 당시에 융성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기도처였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된다.
조선시대 정조 때의 일이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폐해가 극심하던 중 대구 팔공산의 파계사에 주석하시던 용파(龍波)스님은 정조를 알현하고, 불교에 대한 극심한 폐단이 있음을 아뢰니, 정조는 이의 시정을 약속하면서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를 잉태하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다.
마침 정조는 슬하에 세자가 없어 고심하던 중이었다. 이에 정조는 스님에게 세자탄강(世子誕降)을 위한 기도를 명하게 되었다. 용파스님은 이를 수락하고 금선사에서 정진하시던 농산스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두 분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과 삼각산 금선사에서 각자 기도에 들어가셨다.
농산스님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3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기도가 익어갈 무렵 용파스님이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만한 이가 농산스님 밖에 없는지라 농산스님께 왕자로 환생할 것을 아뢰니, 농산스님께서 이를 수락하시고 수빈 박씨의 꿈에 현몽하시어 환생의 뜻을 밝히시고는 기도를 마치고 상서로운 징후를 보이며 열반에 들었다.
이때 왕실에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 하나가 올라 왔는데 "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子誕降)" 이라 적고 있었다. 순조는 바로 이 날 태어났다. 이 날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목정굴이었다. 굴 안에는 좌탈(坐脫)한 채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탈신(脫穀身)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부터 산실(産室)로 흘러 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내수사(內需司)에 명(命)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다. 내원암의 사적에 두분 스님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이 남아있어 이 이야기가 전해지며, 지금도 금선사에는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모시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