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 관산
1. 황 형 장군묘 1450(세조5) ∼ 1520(중종15). 조선 전기의 무신. 그는 전쟁터에서는 지략을 겸비한 명장으로 큰 공로를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강화의 월곶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낙향후 그는 항상 나무심기를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백발의 노장군이 소나무를 심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사람이 묻기를 "대감께서는 이미 노쇠하셨는데 그렇게 힘 드리고 나무는 심어 무엇에 쓰시렵니까"하니 "내가 죽은 뒤에 두고 보아라" 하였다. 과연 장군이 서거한지 7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선과 무기 제작에 요긴하게 사용하였으며 전후 복구사업에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한다. 공은 1520년 62세로 별세하였는데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출처:강화군 홈페이지)
2. 수구문(석수문)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되었다. 3개의 홍예문으로 된 이 수문은 화강암으로 축조하였으며 1910년 갑곶리 선착장을 신설하고 그 옆 동락천 하구의 교량으로 사용하다 1977년 하수문 자리로 이축 하였다가 1993년 동락천 복개공사로 인하여 상수문 자리로 이전 복원하였다가 최근 서문으로 다시 이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강화군 홈페이지)
3. 성공회 성당 강화성당은 고요한 (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이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의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다. 터를 본다면 명당터의 전순쪽이 출입구인데 계단을 만들어 걸어올라 가도록 하였다. 계단을 오르면 산지형 사찰 형식의 건물배치가 특이한데 마치 사천왕문과 인왕문을 통과하여 들어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인왕문 성격을 띤 건물에는 우리 전통양식의 범종을 매달아 놓았는데 범종각의 의미도 함께 느껴지도록 하였다. 본 건물과 사제관은 명당터위에 자리를 잡았으며 한국전통목조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적절히 조화있게 조합함으로써 토착민족과의 융합을 시도한 매우 특이한 사례다.
4. 고려궁지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진 고려궁지는 몽고 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다.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5. 강화 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 고려 인종 5년(1127) 내가면 고천리(고읍)에서 창건되었고 인조 7년(1629)에 유수 이안놀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우면서 비로소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영조 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강학하던 명륜 당 및 내·외삼문 등이 있고, 동·서무는 터만 남아 있다. 배산임수 법칙에 충실하며 특이한 사항은, 대부분의 향교에서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일직선상의 축에서 벗어나지 않는 배치를 하고있는데 강화향교의 명륜당은 그 축선상에서 왼쪽으로 한참을 벗어난 배치형식을 보인다는 점이다. 현재 공사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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